내가 만일 여든 다섯 살이 된다면, 그때에도 나는 여전히 성장하고 변화하는 인간일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영화 <김복동>을 보는 내내 나는, 오지 않은 시간의 나를 상상해 보았다. 1926년생인 김복동 할머니는 1992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증언한 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가 한동안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칩거했다. 다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로 돌아온 것이 2010년, 할머니가 여든 다섯이 되던 해였다.

“군인들에게 끌려다닐 때 나는 나를 찾지 않았어. 해방되고 다들 나를 찾을 때도 나만 나를 찾지 않았어. 나 없이 살았어, 나 없이. (중략) 그래도 나를 찾고 싶었어. 예순 두 살에 나를 찾으려고 신고했어.”

김숨 작가가 김복동 할머니의 말들을 받아 옮긴 증언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에는 열 다섯부터 예순 둘까지의 삶이 지워져버린 한 사람이 있다. 할머니가 1998년 자신의 그림으로 증언한 ‘14세 소녀 시 끌려가는 날’의 그 모습,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총 멘 일본 병사들의 재촉을 받으며 고향을 떠나던 그날에, 할머니의 ‘나’는 멈춰 있었을 것이다. 예순 둘에 다시 ‘나’를 찾은 뒤에도, 할머니는 따뜻한 격려를 받지 못했다. 부끄럽다며 형제가 등을 돌렸다. 일본에 끌려갈 때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던 나라는, 40여년 만에 입을 연 할머니에게 여전히 모질었다. 1990년대 초 집회에 나선 할머니는 곧잘 이를 막는 경찰차에 강제로 태워져 알 수 없는 곳에 떨어뜨려지곤 했다. “거짓말이라고. 그런 일을 겪고 사람이 살 수는 없다”고 낳아준 어머니조차 도리질을 해야 했던 할머니의 진실은 그렇게 거듭 내던져졌다.  

1992년 1월8일 수요시위가 처음 시작된 후, 나는 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모습을 취재하는 기자로서 종종 현장을 지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결연한 모습으로 시위에 나서는 할머니들을 존경하면서도,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당당한 요구라는 것 외에 할머니들의 싸움의 의미를 20대의 나는 잘 몰랐었다. 눈 감았다 뜬 줄 알았는데 30년 세월이 흘랐다는 것을 체험한 50대의 나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할머니들의 진저리쳐지는 고통은 현재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고, 쉽사리 끝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 폭력에 의해 훼손된 ‘나의 사람됨’을 복원하는 투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떳떳한 고향이 있습니다.”

2018년 아픈 몸을 이끌고 일본 교토의 조선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하기 위해 찾아간 할머니는, 그 옛날 자신처럼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교복으로 입은 소녀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떳떳한 고향이 있으니 일본 땅에서 차별받더라도 기죽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소녀였던 할머니는 지은 죄도 없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지만, 할머니 자신은 오늘의 소녀들이 기댈 떳떳한 고향이 되었다. 

한 사람의 삶이, 역사의 텍스트가 된다. 식민 지배의 숨죽인 피해자를 넘어서 평화인권운동가로 탈바꿈한 한 사람의 마음의 진보를 통해 한국 사회도 조금씩 사람다움의 길로 나아왔다. 김복동 할머니의 싸움은 과거와는 달라야 할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2016년 지진이 일본 규슈를 덮쳤을 때, 누구보다 먼저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기부금을 내고 수요시위 현장에서 모금참여를 호소했던 김복동 할머니에게서 오늘의 우리는, 아베는 규탄하되 서울 한복판에 ‘노 저팬’ 깃발이 걸려서는 안된다는 분별력을 배웠다. 독립된 나라에서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이 ‘나의 소원’이라고 했던 것은 백범 김구였지만, 온몸을 던져 그를 실현한 것은 죽음 같은 일제의 만행을 증언하고, 정의를 요구하며, ‘나비 기금’을 만들어 세계 곳곳에서 성폭력의 희생자가 된 여성들을 돕는 일에 나섰던 김복동 할머니들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자 반바지 차림에 까르륵거리며 웃는 소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복동 할머니를 만나고 나온 아이들이었다. 할머니는 그 소녀들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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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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