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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모든 교회들에 꽃꽂이를 제가 합니다. 꽃들에게 나 대신 예배 잘 드리라고 부탁하죠.” 토요일 오후 예배당에서 찬송을 흥얼거리던 중년의 눈엔 이내 눈물이 맺혔다. 꽃집 아저씨는 옆집에 사는 동성애자였다. 기독교인이었지만 커밍아웃 이후 한 번도 교회출석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다. “교인들은 우리 같은 사람 싫어하니까요.”

나는 나이 서른 살에 미국 감리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메인주 한 시골 백인교회에 담임목사로 파송받았다. 서투른 내 영어 설교에도 교인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어서 더 열심히 듣게 된다”며 내 목회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외국인인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조직의 리더 역할을 못했던 것 같다.

당시 동성애는 미국 전역에서 큰 이슈였다. 메인주는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보수적이었다. 호텔에 숙박한 동성애자에게 퇴실을 요구할 수 있었고, 초등학교 교장은 동성애자 교사에게 퇴교를 명할 수 있었다. 동성애자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마저 누릴 수 없었다. 메인주의 동성애자 차별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기자, 주 정부는 주민투표를 계획하였다. 지역교회들도 찬성과 반대 교회로 나뉘었다. 그런데 내가 속한 미국 감리교단에서는 과거 동성애자를 차별한 죄를 인정하고 이들과 함께 교회를 운영하려는 화해의 움직임이 있었다. 교단본부는 이 운동에 동참하는 교회에 일정한 절차를 거친 후 공식적인 ‘화해 교회’(reconciling congregation)라는 인증을 부여했다.

나는 우리 교회에도 동성애자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옆집에 사는 꽃집 아저씨가 바로 그 증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화해 교회’ 인증 절차를 밟자고 제안하는 한편 단 한 명의 교인이라도 반대하면 이 시도를 접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화해 교회’로 가는 모든 절차가 만장일치로 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여러 차례 관련 세미나를 열었고, 어느 날 꽃집 아저씨를 초대해 교인들 앞에서 증언할 기회를 주었다. 최종 투표 날이 되었다. 예상치 않게 일부 교인들이 반대했다. 최종 절차 가운데 지역 신문에 교회가 그동안 차별을 자행했다고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절차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목사님. 우리는 한국 사람인 당신도 담임 목사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동성애자에게 무슨 심한 차별을 했다고 잘못했다 회개하고 지역광고까지 내야 하나요? 못합니다.” 내 뜻과 달랐지만, 그들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약속대로 ‘화해 교회’ 인증 추진을 포기해야 했다. 몇 달 동안 나는 노래를 좋아하는 꽃집 아저씨를 조르고 졸라 성악가인 내 아내와 함께 우리 교회 부활절 예배에서 듀엣찬송을 부르게 했다. 꽃집 아저씨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흘렀다. 그 이후엔 예배드리는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이듬해 나는 캘리포니아주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어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송별예배가 열렸고, 많은 교인들이 마음이 담긴 선물을 건넸다. 떠나는 우리 부부에게 교회 대표 한 명이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엔 “선물은 한 달 뒤 도착할 겁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한 달 후 소포가 도착했다. 개봉하자 거기에는 ‘화해 교회’ 인증서가 들어 있었다. 나는 포기했지만, 나 몰래 교인들끼리 ‘화해 교회’ 인증절차를 다시 논의한 모양이었다. 편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화해 교회’ 인증서는 첫 단추를 끼운 목사님이 보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 눈에서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번도 리더 구실을 못한 나였지만, 신(神)은 자신의 방식대로 일하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동성애가 그렇게 차별받아야 할 중죄라면 예수가 한번쯤 언급하지 않았을까?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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