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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공감]빈틈

경향 신문 2019. 6. 26. 10:41

대학원 시절, 학생들의 농담에 빈번히 등장하던 대상은 교수님들이었다. 악의적인 ‘뒷담화’는 물론 아니었으며 애정 어린 우스갯소리였다고 기억한다. 내가 속한 연구실의 주된 레퍼토리는 지도교수님의 도련님 같은 면모와 관련된 일화였다. 

유학 중인 선배들이 잠시 귀국해 모임을 가졌던 밤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선생님 이야기가 나왔다. 선배 한 분이 “군복무 중 끊었던 사탕 다시 드신 일화 요즘은 말씀 안 하시냐” 묻자, “담배도 아니고 사탕이라니 과연 소공자시네요”라며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형들 놀이판에 끼고 싶은 막내처럼 나는 “순대 같은 건 아예 입에도 못 대실걸요?” 거들었다. 

다음날은 빙 둘러앉아 선생님과 차를 마셨다. 전날 밤 소공자 운운하던 익살은 어디 가고 다들 묵묵히 찻잔만 기울였다. “유학생활 중 순대가 그립다더라” 이후 이야기가 끊기려 하자 한 선배가 “근데 소영이가 선생님 순대 못 드실 것 같답니다”라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답을 하지 않고 웃으셨다. 그리고 며칠 후 제자들과 점심에 순댓국밥을 먹으러 가자시더니 메뉴판도 안 보고 주문하시는 것이었다. 그때껏 분식집 당면순대 말고 먹어본 적 없던 나는 작은 목소리로 아주머니께 “저는 선지랑 간 같은 건 빼고 주세요”라고 했다. 선생님이 소영아, 부르셨다. 

“소영이가 순대 먹을 줄 모르는구나. 순대의 핵심은 간이야.”

내가 대학 입학할 당시 선생님은 우리 단과대에서 제일 젊은 교원이었다. 첫 수업시간에 뵙고 저런 멋있는 교수님도 다 있나 싶었다. 범인들은 닿지 못할 세계에 속한 존재 같았다. 한 노교수님께서 우리 학번의 중간고사 답안 수준에 개탄하며 1학년 때부터 답안지를 독일어로 써내던 총명한 모 교수 일화를 들려주신 이후 더 그러했다. 그런 분이 “순대의 핵심은 간이야” 같은 멘트를 던지며 되갚으시다니. 그날 나는 선생님의 빈틈을 처음 보았다. 어느 근사한 분을 넘어 ‘우리 선생님’으로 생각한 것이 그 무렵부터였다.

그해 겨울방학이었다. 재미 삼아 친구와 사주카페에 갔다. 거기선 두루뭉술하게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줬지만 연애운은 달랐다. 친구는 이듬해 연애운이 찬란하다 했고, 내 경우엔 공부나 열심히 하랬다. 연애는 관심사가 아니어서 대수롭잖게 넘겼다. 친구가 영화표를 예매해뒀대서 카페비용은 내가 내려고 화장실 간 사이 먼저 계산했다. 이윽고 돌아온 그녀는 “내 연애운 소영이가 산 거네” 하였다. 순간 그녀 눈빛에 스치던 소심한 아쉬움과, 운세에 연연한 게 부끄러운 듯 꼭 다문 입매를 보았다. 그때 느낀 애틋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친구는 우리 학번 여학생들 가운데 가장 반짝였다. 1학년 때부터 여느 법대 신입생과는 달랐다. 단발머리 몇 가닥만 파랗게 물들인 그녀가 강의실로 들어서면 환하게 빛이 났다. 동일한 장면도 나 혼자 있으면 인디영화였지만 친구가 더해지면 청춘드라마였다. 학부시절 나는 친구에게 선망과 더불어 미묘한 상대적 박탈감을 품었다. 그 박탈감을 지우고 온전히 마음 연 계기가 ‘미신스러운’ 빈틈을 목도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운을 사고도 이듬해나 다음해나 연애는 못하였지만, 대신 대학원생활 내내 서로 의지한 벗을 얻었다.

돌이켜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을 막연히 동경하는 것은 상대의 매력과 장점 때문일지라도 그를 이해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우연히 보게 된 빈틈을 통해서였다. 누군가의 세련된 매너에서 어색함을 감추려는 몸짓을 읽었을 때, 냉소 이면에서 뜨겁고 서투른 열정을 보았을 때, 강인해 보였던 이가 실은 심약한 ‘새가슴’임을 느꼈을 때.

아주 가끔 그게 안되기도 한다. 이해관계가 대립할 경우 누군가의 단점이 빈틈임을 알아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편 빈틈이 아예 찾아지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보고 또 살펴도 근사하기만 한 거다! 짐작건대 내 고집스러운 선망이 그의 약함마저 멋짐으로 채색했기 때문일 테다. 살아가면서 충돌하는 이의 빈틈을 연민하고, 선망하는 이의 빈틈은 알아보게 됐으면 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빈틈에도 좀 너그러운 마음을 품게 되면 좋겠다.

<이소영 | 제주대 교수·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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