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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공감]슬기로운 자립 생활

경향 신문 2021. 1. 27. 09:37

목발을 짚고 진료실에 들어오신 재아씨(가명). 자립해서 좋으냐고 여쭤보았더니 별말씀 없이 씩 웃기만 하신다. 재아씨는 지적장애와 지체장애가 함께 있는 분으로 실외에서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고, 실내에서는 주로 기어다니거나 목발을 짚고 천천히 이동하는데, 그날 진료실에는 목발을 짚고 들어오셨다. 아마도 전동휠체어는 대기실 한쪽에 주차되어 있을 테지.

4년 전 장애인 공동생활시설의 이용인과 그 시설의 주치의(촉탁의) 관계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재아씨의 가장 큰 건강 문제는 요로결석이었다. 요로결석은 재아씨가 자립을 준비하고 있을 때 덮쳐왔다. 이미 두세 차례 요로결석 때문에 응급실을 방문했던 터다. 재아씨도 두려움이 있었다. 밤에 겪은 배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무섭지 않을 리 없다.

시설에서는 의료사례회의가 열렸다. 시설장을 비롯해 사회복지사, 물리치료사, 간호사, 작업치료사, 영양사 선생님들이 모두 함께하는 다직종의 의료사례회의가 열렸고, 나도 촉탁의 자격으로 참여했다.

요로결석을 예방하기 위해선 물을 많이 마시는 게 필요한데, 재아씨와의 상담과 생활관찰을 통해 확인된 건 오히려 재아씨가 극도로 물을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지체장애로 인해 화장실에 자주 가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특히 밤에 화장실에 갈라치면 누군가에게 데려다 달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매일 얘기하는 게 내키지 않아서 그런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물을 마시지 않는 습관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소변 농도가 진해지니 요로결석은 계속 재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이 요로결석이 재아씨가 그토록 원하는 자립을 가로막고 있었다.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고 재아씨를 설득하였으나, 어렸을 때부터의 습관은 도통 바뀌지 않았고, 수분 섭취가 부족하여 요로결석이 잘 생긴다는 인과 관계나 요로결석이 계속 재발하면 자립하기 어렵다는 조건 명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우리는 머리를 맞댔다. 밤에 침대에서 일어나 어둠 속에서 주섬주섬 목발을 찾아 짚고 일어나 스위치를 켜고 문을 열고 화장실에 가는 재아씨의 불편을 상상하며, 자리끼와 요강을 방에 두고 주무시던 옛날 어른들의 방식을 써보면 어떨까 의논했다. 소변기를 방에 구비해 요강처럼 사용한 후 낮에 정리할 수 있도록 하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물을 두어 자주 마실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좀처럼 음수량은 늘어나지 않았다. 식사 때마다 물 한 컵씩 마시도록 하는 건 어떨까. 식판과 함께 물을 제공하였지만, 마시도록 강제할 수는 없었다. 시설의 사회복지사, 영양사 선생님들이 “식사 후 물 드세요” 얘기라도 할라치면 잔소리하지 말라며 화를 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식판과 함께 나온 물컵을 노려보시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다시 긴 회의를 했고, 이번에는 재아씨가 믿고 따르는 목사님께 부탁을 드리기로 했다. 생활에 간섭하는 잔소리라고 느껴지지 않게, 당신의 건강을 걱정해서 하는 부탁으로 재아씨가 느낄 수 있도록 설득해 주십사고. 당연히 목사님은 흔쾌히 수락하셨고, 목사님의 권위에 기대어 우리의 표현도 달라졌다. “식사 끝나고 이 물 한잔 꼭 드세요, 재아씨. 목사님 말씀 기억하시죠?” 그 후로 지금까지 4년 동안, 재아씨의 요로결석은 다행히 한번도 재발하지 않았고, 재아씨는 2년 전 그토록 그리던 자립의 꿈을 이뤘다. 소변기를 매일 옆에 두고 자는 것과 식사 후에 꼭 물 한잔을 마시는 건 이미 습관이 되었다.

자립 이후에도 의논하고 싶은 건강 문제가 있거나 아픈 데가 있으면 전동휠체어를 몰고 낯익은 의사인 나를 찾아 살림의원으로 오신다. 나는 재아씨가 건강하게 지내시는 것에 안도하며, 속으로 매번 감탄한다. 재아씨의 전동휠체어 운전 솜씨는 정말 일품이라니까.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가정의학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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