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학원에서 수험생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할 무렵, 나를 무척 따르던 학생이 있었다. 그 애는 우르르 몰려다니며 유치한 장난이나 치던 또래 남자아이들과 어딘가 달랐다. 독일 성장소설들에 묘사된 예민한 소년성 자체였다고나 할까. 크리스마스엔 여느 학생들처럼 ‘수업 째고 놀자’고 조르는 대신 자신이 찍은 사진을 현상하여 액자에 넣어 선물했고, ‘쌤’ 같은 줄임말을 쓰지 않고 선생님이라 또박또박 불렀다. 또 자정 가까운 시각에 전화해서 본인의 철학적 고민들을 털어놓아, 심야라디오 들으며 우걱우걱 과자 먹던 나를 당황케 만들곤 하였다. 더욱이 고민의 8할은 내가 모르는 심오한 불교철학 관련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읜 친구였음을 알게 된 것은 한참 지나, 수학선생님과 다툰 그 애가 학원을 그만둔 다음이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입시 전까지 이따금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공부도 함께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가을날, 그 애는 머뭇머뭇하더니 내게 소원 하나만 들어줄 수 있느냐 물었다. 자기와 절에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본인은 불교‘철학’에 심취해 있으며 이론적으로만 매료된 것이라 강조했으면서도 시험을 앞두고 마음 누일 데가 필요했던가 보다. 그 무렵 내가 어른인 척하였으나 학생들의 짓궂은 장난에 대처할 줄 몰라 목소리 떨리던 스물두세살이었듯, 그 친구 역시 조숙한 티는 내었으나 열아홉살 아이였던 것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우리는 종로 한 골목에 위치한 큰 절을 찾았다. 불국사 같은 유적지가 아닌 일반 사찰에 들어가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 싶다. 대전 한가운데서 인자하게 미소 짓는 부처님을 보자 그 애는 철학에의 심취는 다 어디 갔는지 합장 후 곧바로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 지나서야 곁에 엉거주춤 서 있는 내가 마음 쓰였던 모양이다. 내게 베로니카라는 가톨릭 세례명이 있음을 그 친구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함께 절하자는 말은 차마 못 꺼내는 듯했다. 하지만 눈빛엔 ‘부처님에게 선생님도 큰절 올리면 얼마나 좋을까’ 적혀 있었다. 

나는 불상 앞에 일단 엎드렸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양손은 제비처럼 옆으로 모으는 이른바 명절 세배 같은 절을 하다 주위 신도들을 훔쳐보며 자세를 수정했다. 손바닥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후에는 각도가 적당한지 살피고자 두리번거렸다. 그 모양새가 어찌나 어설프고 우스웠는지, 저편에서 참선 중이던 스님이 놀라서 고개를 다 치켜드셨다. 말하자면 나는 이방의 신에게 절을 올린 셈이었으나, 그날의 행동이 잘못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같이 절을 하니까 그 애가 어찌나 좋아하던지. 학교선생님도 아닌 그저 알바생 누나였지만, 고3 수험생을 살뜰히 챙겨줄 엄마를 갖지 못했던 아이에게 필요한 위로를 한 줌 더해줄 수 있다면 천수관음한테라도 당장 엎드릴 수 있었다. 그 순간, 내가 믿고 또 사랑하는 신 역시 거기서 싱긋 웃고 계셨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탈출기 20:5)이라며 잠시 토라진 척은 하셨을지라도 말이다. 두 분이서 이렇게 귀엣말을 주고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쟤 좀 보세요. 내 앞에선 꾸벅꾸벅 졸기나 하더니 여기 와서 넙죽 절하는 폼 하고는.”(예수님) 

“하하, 그게 다 제 백만불짜리 미소 덕분이지요. 그리고 저처럼 귀가 크면 인복이 많은 법이랍니다.”(부처님)

그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아이는 절에 함께 가주어 고마웠다고 말했다. “부처님이 내가 절하는 폼 보시고 돌아앉으셨을 것 같은데?” 하며 웃었더니 진지한 얼굴로 답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선생님이 필요로 할 때요. 저도 성당을 찾아가서 선생님의 예수님한테 기도할게요. 꼭요.”

말만으로 고맙다며 웃어 넘겼지만, 살면서 때때로 그 약속이 떠오른다. 그럴 때면 마치 결정적 찰나에 쓰라며 건네받은 묘약을 옷섶 안에 숨겨둔 옛이야기 주인공처럼 든든해진다. 필요로 할 어떤 순간 나를 위해 미사에 참례해줄 신실한 불자가 지금 세상 어딘가에서 삶을 꾸려 가리라 상상하면 말이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거리 연등장식을 구경하며, 내밀히 품고 있던 ‘기도 찬스’의 기억을 풀어본다.

<이소영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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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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