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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수록 좋은 것이 참 많다. 부모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도 그중 하나다. 나에게 좋은 부모였는가를 넘어 한 인간의 입체성을 좀 더 세심하게 살피게 된다. 청년 시절 바라본 아버지는 꽤나 보수적이고 완고해 보여서 반항을 많이 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리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만화는 유해한 것이라 믿던 시절, 책과 함께 양질의 만화를 자주 사다주셨다. 지금 보니 명작 반열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늘 바쁜 중에도 가족 생일엔 작은 이벤트라도 했고, 정기적으로 맛집, 영화 등 문화경험을 시켜주셨다. 쉬는 주말엔 직접 레시피를 궁리하며 요리를 하셨다. 의견이 달라도 강요보다는 경청하고 토론하셨다. 20세기 중반세대의 고루한 남성성 속에 놀랄 만큼 진취적인 면이 공존했던 분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니, 일본에서 나고 자라셨다. 당시 일본은 경제만큼 문화적으로도 한국보다 100년 이상 앞선 나라였다. 아버지는 근미래에서 오셨던 것이다.

내 삶도 그렇다. 결혼·출산을 비롯해 내 세대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가치·취향들과는 다소 다른 선택과 경험이 많은데, 지금 세대에는 익숙한 트렌드가 되어 있다. 하지만 내 안에도 사안에 따라 보수성이 존재한다. 나의 세계관과 가치 형성에는 대한민국이라는 영토성과 X세대의 시간성만큼 양가 조부모로부터 이어진 다른 세계와의 이른 접촉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진보와 보수는 정치성향 분별에 주로 사용되지만 전반적인 삶의 태도에 가깝고, 절대적이며 고정불변하기보다는 놓여진 시공간에 따라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또래에서 보수적인 젊은이도 노년의 사고보다는 앞서나가지만, 소외지역의 청년보다는 도시 중년이 새로운 가치를 체화할 확률이 높다. 진보·보수 편가르기가 유난스러운 나라지만, 대한민국은 타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경험의지, 흡수력이 매우 높은 편이다. 단시간에 최고 수준의 선진국이 된 것은, 지구촌에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개방성, 진보적 특성에 기인한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세상이 ‘내향성 정당과 외향성 정당’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상상해 보자. 두 정당의 지지자들이 상대는 악이고 꼴통이라며 혐오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성향엔 옳고 그름이 없고 대개의 인간은 양면성 혹은 다면성이 존재해서다. 유명한 개그맨들이 평소의 자신은 수줍은 편이라 소개하는 것을 자주 본다. 내향적인 사람도 편안한 상황에서는 활발해지고 외향적인 사람도 낯선 상황에선 위축될 수 있다.

진보와 보수도 다르지 않다. 세계적인 뇌과학자들은 진보와 보수 성향 역시 천성적인 기질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새로운 자극이나 경험에 적극적인 사람과 조심스러운 사람의 차이다. 타고난 기질에 각자의 환경과 경험 요소가 만나며 특성이 강화되거나 완화되고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향성과 평균성은 있으나 완벽히 항구적인 것이 아니고, 선과 악의 차이는 더욱 아니다.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진보와 보수 이념’은 의미없고 허황된 프레임에 가깝다.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과장된 흑백논리에 휘둘려, 내 편이면 되고 네 편이면 안 되는 내로남불이 횡행한다. 신기루와 다름없는 갈라치기 이념과 자기 정체성에서 탈피해 개별 사안의 의미와 가치를 고민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어떤 인간도 약육강식의 생존과 번식밖에 모르는 동물들보다 진보적이다. 사고가 진보했기에 육체도 진화하고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 성장과 퇴행의 갈지자걸음으로 느리게 나아가지만 멸종하지 않은 모든 존재에게 진보는 선택이 아닌 필연이다. 각자의 속도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만이 선택일 뿐.


박선화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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