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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공정 사회

경향 신문 2019. 11. 8. 11:34

청년세대가 공정에 과민하다는 볼멘소리가 들려온다. 선배세대의 진보와 보수가 서로 다투면서 이룩한 민주화와 경제성장이 이들에게는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체험된다. 진보의 민주주의는 공정하지 않다. 소수자라는 이유로 별다른 노력 없이 남이 이룬 성과를 빼앗아 누리는 무임승차자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나는 온갖 진입장벽을 넘어 정식으로 여기 들어왔는데 너희는 평등 운운하며 데모해서 날로 먹겠다고? 보수의 성장주의도 공정하지 않다. 스스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능력주의를 믿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 보상이 부모가 뿌리고 거둔 성과를 누리는 세습과 비교해 너무도 초라하다. 빽 없이 혼자 힘으로 성과를 이루려고 애쓰고 있는데 너희는 잘난 부모 둔 것도 능력이라고 우리를 조롱하며 알맹이를 모조리 차지해?

청년세대가 보기에 선배세대의 가치는 허약하다. 진보와 보수 모두 공적 담론에서는 민주주의와 성장주의를 설파한다. 진보도 성장주의를 말하지만, 보수의 성장주의보다 무엇이 더 낫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보수도 민주주의를 내세우지만, 진보의 민주주의보다 무엇이 뛰어나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둘 다 광범한 호소력을 지닌 보편 서사를 구사할 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별 차이도 없는 규범을 두고 괜한 시비다. 진보는 공적 담론에서는 소수자의 평등을 말하지만, 비공식 일상생활에서는 자식의 성공을 위해 평등을 훼손하는 온갖 편법을 마다하지 않는다. 보수는 공적 담론에서는 대한민국의 성장을 주창하지만, 비공식 일상생활에서는 남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가족만의 성장을 위해 세습하느라 바쁘다.

선배세대의 기만적인 ‘내로남불’ 싸움을 지켜보는 청년세대는 자조한다. 소수자도 아니고 잘난 부모를 둔 것도 아닌 나같이 평범한 청년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생각해낸 대안이 고시다. 고시야말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는 것. 언뜻 보면 그럴듯하다. 객관식 시험이라 누구든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선 일정 시간 개인의 노력을 투여해야 하고, 시험 보는 과정도 남이 대신해줄 수 없으며, 결과의 차등도 개인 노력의 결과이므로 정당한 불평등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시험이 단편적 지식을 최대한 많이 외웠다가 순식간에 풀어놓아야 하는 ‘순간 기억 능력 테스트’라는 점이다. 창의력이 제일 중요한 4차 산업혁명이 다가오는데 몇 가지 선택지 중 정답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단순 유식’한 인식구조를 가진 인간들을 대거 생산해 어쩌자는 것인가? 시험 결과로 한 줄 세워 평생 신분을 결정하자고? 시험을 통과한 승리자들에게 삐뚤어진 엘리트 의식을 심어줘 끼리끼리 똘똘 뭉쳐 권력을 마구 휘두르게 하자고? 종일 골방에 박혀 암기시험 공부에만 몰두하던 몰사회적 인간이 지배하는 참혹한 몰도덕적 사회는 이미 충분히 겪었다. 인지능력 테스트에만 능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시험에 실패했다는 과도한 패배감에 공정은 둘째 치고 게임의 장에 아예 나가려 하지 않는다. 개, 돼지 취급받기 일쑤다. 조국사태를 계기로 또다시 교육 개편 소리가 나오는데, 순간 기억 능력 테스트로 되돌아가서는 안된다. 대신 청년이 가족 밖에서 인간으로 현상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키워줘야 한다. 학교가 이런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어떤 제도도 완벽할 수는 없다. 기존 제도의 원래 취지가 훼손되고 공정성이 침해됐다면 바로잡아 마땅하다. 윤리적 결함이 드러났다면 이를 고칠 세밀한 지침도 마련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건 가치교육이다. 청년세대에게 좋은 삶에 대한 지향 없이 공정만 추구해선 안된다고 가르쳐야 한다. 공정한 게임을 하는 사회는 정의로울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사회적 삶의 의미를 장기적으로 만들어나갈 수는 없다. 더불어 누릴 수 있는 좋은 삶이 뭔지 물을 때라야 가능성이 열린다. 민주주의와 성장주의는 치열한 현대사를 겪으며 선배세대가 만들어놓은 가치다. 생명력이 다했다면 이제 청년세대가 나은 이야기로 다듬고 새롭게 사용해서 더 좋은 삶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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