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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석유화학회사 홍보 책자를 만든 적이 있다. 그 회사는 폴리에틸렌을 생산했는데, 쌀알 같은 폴리에틸렌 알갱이를 촬영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색깔의 알갱이를 섞어 찍었다가, 나눠 찍었다가 하느라 알갱이하고 씨름해야 했다. 알갱이를 색깔별로 구분해야 할 때는 손이 모자라 한 무더기씩 집으로 가져가 온 식구가 밤새 머리를 맞대고 앉아 골라내기도 했다. 식구들은 신기해했다. 이 작은 알갱이가 파이프가 되고, 비닐봉지가 되고, 컵이 되고, 헬멧이 되다니…. 

어디 그것뿐이랴. 변신이 무궁무진한 폴리에틸렌은 영국왕립화학협회가 꼽은 ‘현대 사회를 만든 위대한 화학 발명 다섯 가지’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실제로 폴리에틸렌, 그러니까 플라스틱을 쓰지 않는 현대인의 삶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인류는 다시는 종이를 불리고 이겨 만든 함지나 박을 쪼개 속을 파낸 바가지를 쓰던 때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 영원불멸의 발명품에 도취된 인류는 플라스틱을 물어 와서 새끼한테 먹이는 바닷새나 비닐봉지를 뜯어먹는 북극곰 사진을 보면서도 대개 초연하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인간 때문에 다른 동물이 고통받는 걸 지켜만 볼 수는 없다고 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지요. 맨 먼저 결심한 게 대형 마트에 가지 않는 거였어요. 마트에서 장을 보면 비닐봉지는 물론이거니와 플라스틱 용기까지 쓰레기가 한 상자는 나오잖아요.”

그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전통시장을 다니기 시작했으며, 얼마 전부터는 시장에 갈 때 아예 장바구니 안에 반찬통을 넣어 간다. 상인들은 으레 비닐봉지를 뽑아 식재료를 담으려다가 그가 내민 반찬통을 의아하게 바라본다고 했다. “유난 떤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도 번거롭긴 하지요. 과연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나 하나라도 덜 쓰면 낫지 않을까요?”

나 하나라도, 그 말을 곱씹는 내 손에는 생수병과 깜장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나 하나 때문에 이렇게 하늘이 희뿌옇게 된 것은 아닌가? 무턱대고 쓰고 버리고 만들고, 폴리에틸렌 분자 사슬보다 강한 이 사슬을 끊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영 눈부신 봄볕을 잃는 것은 아닌가?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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