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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호선 전철 안에서 만난 그는 손을 들어 전철 벽면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자리에는 본래 광고판이 끼워져 있어야 했는데, 웬일로 붓글씨와 수묵화가 그려진 종이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저 작품들이 다 노인들이 쓰고 그린 거예요. 우리 학교 학생들 작품이에요. 정말 잘 쓰지 않았어요?”

그의 말대로 전철 벽을 메운 작품들은 하나같이 매끄럽고 정갈했다. 그는 한문으로 쓴 붓글씨를 소리 내 읽어준 뒤 그의 긴 인생 얘기를 시작했다. 남쪽 바닷가 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초등학교만 마치고는 집안일을 도왔다고 했다. 그 시절 대개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의 아버지도 여자가 공부 많이 해서 뭣하냐며 중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딸을 주저앉혔다.

“교복 입고 학교 가는 애들 보면 부러워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그의 아버지는 대여섯 살에 천자문을 외운 큰아들을 법대까지 보낸 걸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던 다른 자식들의 원망은 외면했다. 그는 그때 악착같이 매달려 학교에 다녀야 했다면서 물러 터진 자신을 탓했다.

“평생 못 배운 게 한이었죠. 그런데 3년 전 나 같은 노인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다는 걸 알고는 한달음에 달려갔어요.”

작년에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고교 수업을 듣는다며 수줍게 웃는 그의 얼굴이 열일곱 살 소녀처럼 곱다. 영어로 된 간판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새 세상이 열린 것 같았다는 그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별말을 다한다면서 말을 흐렸다. 

“사실 가족들한테도 이런 얘기는 하기 그렇거든요. 자식들 앞에서 뒤늦게 공부하는 걸 자랑하는 것도 우습고….”

그의 꿈은 대학교까지 가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우리 어머니의 꿈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아온 우리 어머니도 꿈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 어머니도 낯선 사람에게는 자기 자랑도 하고, 평생 간직한 꿈도 얘기할지 모른다. 자식들은 결코 묻지도 귀 기울여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얘기를. 나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그를 두고 전철에서 내리면서 어머니한테 전화나 드려야지 했다가도 일을 보다가 잊고 말았다. 자식이란 참 무심하다.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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