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중국 지린(吉林)에서 왔다. 그의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먹고살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척박한 땅을 개척한 수십만명의 조선인 중 하나다.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지린에 닿았을 때 그곳은 일본 괴뢰군이 세운 만주국의 땅이었다. 

조선일보 기자였고, 친일문예지 ‘조광’의 편집자였던 친일 문인 함대훈이 만주국의 여러 지역을 돌고는 ‘만주국이 건국한 지 6년. 그동안 여기 이 높고 큰 건물과 넓고 긴 도로가 질서정연히 째였다. 이 건설이 만주인도 아니오 조선인도 아니오 일본인이다. 일본인의 위력은 이만치 크다’(<일제말기 문인들의 만주체험>, 민족문화연구소)는 글을 발표했을 무렵, 만주 땅의 모든 학교에서는 조선어가 금지되었다. 학교 안에서 조선말을 하는 학생은 괘패라는 것을 줬는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괘패의 수를 세서 벌을 받았다(<기억 속의 만주국Ⅰ>, 강대민 외). 

조선인이 아니라 황국신민이라 말하길 강요받았지만, 그들은 만주국일 때도 중국일 때도 굳건히 우리말과 문화를 지켜냈다.

지린에서 온 그는 자신의 가족이 지린에 뿌리를 내리게 된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는 20대에 혼자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떠났던 땅으로 돌아와 건설 현장에서 무거운 철근을 나르며 오래전 이 땅을 떠났던 이들의 절박하고도 쓸쓸한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꽤 열심히 일했고, 몇 년 전에는 건축자재를 만드는 작은 공장 하나를 인수했다. 지린에 있던 부모님과 동생이 와서 공장 일을 도왔다. 며칠 전 그는 아버지 칠순을 맞아 식당을 빌려 잔치를 했다. 아직 조선족들은 칠순잔치를 한다는 그의 말대로 대림동에서 꽤 유명한 중국식당은 방마다 성대한 칠순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곱게 한복을 입은 노인이 트로트를 열창하는 며느리와 아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괜히 뭉클했다. 노인의 희미한 웃음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으며, 그리고 지켜야 했던 우리 민족의 고단한 역사가 담겨 있다. 한 사람의 삶이 역사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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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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