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일없이 길거리를 쏘다니기도 하고
강가에 나가 강물 위를 나는 물새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카사블랑카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바이칼호의 새 떼들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니까
다 늙어 꿈이 이루어져
바이칼호에 가서 찬 호수에 손도 담가보고
사하라에 가서 모래 속에 발도 묻어보고
파리의 외진 카페에서 포도주에 취하기도 했다
그때도 나는 행복했다, 밤마다 꿈속에서는
친구네 퀴퀴한 주막집 뒷방에서 몰래 취하거나
아니면 도랑을 쳐 얼개미로 민물새우를 건지면서
창밖엔 눈발이 치고
모래바람 부는 사하라와 고추잠자리 떼 빨간 동구 앞 길을
번갈아 오가면서, 지금 나는
병상에서 행복하다
-신경림(1935~)
일러스트_김상민 화백
한때 바람을 쐬러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자유롭게 높이 날아오르는 새들을 보았다. 그러면서 카사블랑카와 바이칼 호수로의 유랑을 꿈꿨다. 그리고 그 꿈을 이뤘다. 이국의 큰 호수와 아득한 모래사막과 번화한 거리를 다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옛 마을의 뒷방과 좁은 개울에서 보냈던, 소중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오늘은 눈발이 유리창에 하얗게 치고, 시인은 타국의 막막하게 펼쳐진 사막과 옛 마을의 어귀를 번갈아가며 생각한다. 꿈이 있었던 시간과 방황했던 시간은 행복했다. 그리고 꿈을 이룬 시간도 행복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화관(花冠)을 쓴 것처럼 눈부신 순간들이다. 밤하늘에 뽈록거리는 별처럼 빛나는 순간들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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