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이 범람하고 있다. 말이 모자라서 세상이 어지러운 건 아닐 것이다. 거리의 간판처럼 아우성치는 말들. 신호등이 많다고 교통사고가 안 일어날까. 긴 계급장 같은 횡단보도를 건널 적에도 발목에 걸리적거리는 게 있다. 너무 많은 교훈이 전기처럼 흐르는 세상이다.

예전 산에 드물게 갈 적엔 언제 저 꼭대기를 다 다녀오나, 한숨과 함께 출발을 했다. 이젠 그 지경은 벗어났다. 중앙선도 없는 산에 가면 동물이 되지 않겠다는 식물들, 모음만으로도 저희들끼리 잘 통하는 빼어난 새소리, 그조차도 무의미로 구겨버리는 바위의 침묵을 만난다. 높은 깔딱고개를 오를 땐 몸에서 끓어나오는, 말이 되지 못한 신음을 내뱉는 재미도 덤으로 얻는다. 아이들이 장난감에 몰두하는 건 제 하자는 대로 아무 대꾸 없이 그대로 따라주기 때문이다. 최근 산이 부쩍 좋아진 건 그곳에는 말이 그리 필요치 않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덕분이다.

그림ⓒ이해복

얼마 전 열하일기 탐사를 다녀오고 난 뒤, 요동벌판을 지날 때 사방에 산이 정말 없더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가차없이 이런 반응이었다. 산이 없다면 꽃도 없기에 슬프겠군요. 산의 높이가 세상의 깊이와 비례한다고 굳게 믿는 나의 꽃동무. 그이는 가없는 벌판을 두고 또 다른 의미에서의 호곡장론(好哭場論)을 설파하는 중인 듯했다. 꽃이 산을 일으켜 세운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평지의 알통처럼 솟은 산. 산은 지하 저 중앙에서 누군가가 꽂아놓은 압침 같다. 우리 사는 세계가 이나마 유지되는 건 저 산이 저곳에서 자리를 잡아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제는 산에 가서 금강애기나리를 보았다. 올 더위에 호되게 당했는지 갸름하던 잎들은 그을린 흔적이 역력하다. 주근깨투성이의 꽃잎 6장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겠다는 듯 뒤로 확 젖혀지는 게 특징이었다. 오늘은 이미 지고 없는 꽃 대신 이름에 주목해 본다. 왜 애기 앞에 금강을 얹어두었을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있어야 할 것만이 있는 그런 상태의 비유적인 말이 금강이기도 하다. 해서 경이나 산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금강. 말로서 말을 끊어버리는 금강이다. 말없는 산속의 말없는 금강애기나리 앞에서 괜히 울적해졌다. 금강애기나리,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일반 칼럼 > 이굴기의 꽃산 꽃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라천마  (0) 2018.09.11
끈끈이귀개  (0) 2018.09.04
금강애기나리  (0) 2018.08.28
제비동자꽃  (0) 2018.08.21
해오라비난초  (0) 2018.08.07
큰까치수염  (0) 2018.07.3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