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알파고가 도전장을 내민 거예요?” 유학 시절 미국에서 키운 큰딸은 우리말 비유나 뉘앙스에 좀 약하다. 식탁 구석에 박힌 공을 억지로 꺼내려고 해서 머리를 쓰라고 했더니 정말 식탁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려고 했다. 아무튼 알파고가 휴보 같은 휴머노이드 로봇인 줄 알고 자기 팔로 도전장을 던졌나 궁금했나 보다. 물론 알파고가 아니고 알파고를 만든 사람들이 도전한 것이다. 그러니까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의 말처럼 인간 대 기계가 아니고 인간 대 인간의 대결이다. 누가 이기든 인류가 승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이 몰고 올 파장을 생각하면 인간 대 인간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꺼림칙하다.

이번 대국이 펼쳐지기 전 대부분 이세돌 9단의 압도적인 우세를 예상했다. 그래서 이세돌 9단이 져야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미리 대비할 수 있어서 인류에게 오히려 도움이 될 거라고 농담할 정도였다. 농담이 현실이 되면서 충격과 우려, 수많은 해석이 이어지고 있다. 집단지성과 천재의 대결이라거나, 컴퓨터 1202대에 맨주먹으로 맞선 인류 대표라거나, 막강한 자본과 기술력으로 하이테크제국을 꿈꾸는 구글의 음모라는 등 기술 낙관론과 비관론 양측에서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나온다.

사실 인공지능을 떠나 기계화, 자동화로 인한 대량실업은 근대 산업혁명 이래 지속적으로 씨름해온 문제다. 케인스는 일찍이 기술혁신으로 일자리가 사라지는 속도가 새로 일자리가 생기는 속도보다 빠른 현상을 소위 ‘기술실업’이라 칭했다.

이전에는 저숙련 육체노동이 대체되었다면, 근래 다시 기술실업이 회자되는 이유는 인공지능의 도래로 더 이상 고숙련 사무직 노동자, 심지어 웬만한 전문가들도 기술실업에서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는 일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일차원 스펙트럼으로 늘어놓으면 양극단 조금을 빼고는 기계와 인공지능으로 다 사라진다는 말이다. 지극히 사소한 육체노동이나 지극히 창의적인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 외에는 안심할 수가 없다.

기술실업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알파고의 승리가 인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유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할 기회를 준 것이다.

하버드대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모든 심리학자는 일생 동안 다음 하나의 문장을 완성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인간은 를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한동안 인간은 유일하게 도구를 사용하고, 유일하게 언어를 사용하고, 유일하게 사회성을 지닌 동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밝혔듯이 동물들도 도구를 쓰고(침팬지), 고도의 의사소통을 하고(돌고래), 나름 매우 사회적(개미, 꿀벌 등)이다.

이제 인공지능의 등장과 함께 더 이상 인간은 ‘사고를 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질지 모른다.

몸속에 인공지능 칩을 이식한 사이보그._경향DB


인공지능의 시조인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딴 튜링테스트는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짧은 대화를 한 후 상대방이 컴퓨터인지 인간인지 판정한다. 1950년 ‘컴퓨터와 지능’이라는 논문에서 튜링은 50년 뒤 일반인이 일정 시간 대화를 통해 상대가 컴퓨터인지 알아내는 확률이 70%를 못 넘을 것으로 (즉 컴퓨터가 사람을 성공적으로 속일 확률이 30%를 넘을 것으로) 예측했다.

가장 유명한 튜링테스트 행사는 1991년부터 휴 루브너라는 자선사업가이자 발명가의 지원으로 시작된 루브너상인데 심사위원을 제일 잘 속인 컴퓨터 프로그램에 ‘가장 인간적인 컴퓨터상’을 수여한다. 공교롭게도 튜링 탄생 60주년이 되는 해인 2014년에 유진 구스트만이라는 13세 우크라이나 소년을 자칭한 러시아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33%의 심사위원을 속임으로써 튜링이 예측한 30%를 최초로 넘어섰다.

그런데 루브너상 행사에는 상이 하나 더 있다. ‘가장 인간적인 인간(The Most Human Human)’에게 주는 상이다. 즉 익명의 심사위원들이 대화 과정에서 인간이라고 판단한 비율이 가장 높은 참가자에게 주는 상이다. 튜링테스트에서 아이로니컬한 것은 인간과의 대화 과정에서 컴퓨터가 성공적으로 인간으로 오인되는 것보다 인간이 컴퓨터로 오인되는 것이다. 도대체 (아무리 익명의 온라인 채팅으로 이루어진다지만)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데 컴퓨터로 착각당할 수 있는가.

결국 튜링테스트는 컴퓨터가 얼마나 인간다운가가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인간다운가에 대한 테스트이다. 즉 인간이란 누구이며 인간은 다른 인간과 어떻게 소통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인 것이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주인공 도로시는 뇌가 없어 새들한테 무시당한다고 하소연하는 허수아비에게 뇌가 없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허수아비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도 없이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느냐고 되묻는다.

기술실업이 양극단을 제외한 사람들을 모두 ‘나머지’ 인간으로 만든다면 (아마 내가 50년을 더 산다면 거의 100% 확실하게 ‘나머지’ 인간이 될 것이다), 남는 문제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들(인간이든 기계든)보다 잘하는 일을 찾아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과장하자면 ‘비교우위’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근 200년 흘러온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우연히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정확히 240년 전(177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첫 대국이 이루어진 3월9일과 같은 날 출판되었다.


김소영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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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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