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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 동거·사실혼, 보편가치 아니다.” 염수정 추기경이 생명주일(5월2일)을 맞아 담화문을 발표한 후 여러 매체가 추기경이 동거와 사실혼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고 썼다. 담화문 중 “여성가족부가 추진하는 ‘비혼 동거’와 ‘사실혼’의 ‘법적 가족 범위의 확대 정책’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졌던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라는 문장을 빌린 것이다. 마침 정부가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을 발표하기 불과 며칠 전에 종교계의 주요인사가 정부 계획에 반대한다고 했으니 뉴스가 될 만했다.

궁금해 전문을 읽어보았다. 한데 담화문 내용은 기사와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인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는 교계의 오랜 신념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인용구만 보면 오해의 여지가 있으나 전체를 보면 동거나 사실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결혼에 한정해 교회의 입장을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이다. 가치관의 변화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처럼 한번에 진행되지 않는다. 여러 세대가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에서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지난해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가 ‘혼인·혈연관계가 아니어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라는 데 동의했을 만큼 가족에 대한 인식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세대 간의 의견차도 크지 않다. 오히려 법과 제도가 사람들의 인식과 실제 가구 구성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1인 가구 포함 2인 이하 가구가 전체의 60%가량으로 증가세이며, 부부와 미혼자녀로 구성된 가족은 30% 미만으로 점점 줄고 있다. 향후 5년간 가족정책의 토대가 될 이번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은 이러한 변화를 수용한 것이다.

동거와 사실혼을 인정하면 가정이 해체될 것이라는 우려의 소리도 있으나 북유럽을 비롯한 서구를 보면 동거와 사실혼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가정 형성을 장려하고 출산율을 높이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추기경은 담화문에서 “혼인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지속적이고 전적인 결합으로, 서로를 완성하고, 관심과 배려, 그리고 출산을 통해 자연스러운 인생 여정을 걷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고 했다.

결혼과 비혼 사이에는 무수한 고민과 이유가 있다. 관심과 배려로 서로를 완성하는 지속적이고 전적인 결합이 혼인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자연스러운 인생 여정을 사회가 도와주었으면 한다. 행정 편의를 위해 함께 사는 이로 등록하고 시작할 수도 있고, 몇 년 이상 살면 결혼한 것과 같은 권리를 주는 것도 방법이다. 제도가 인정하지 않으나 이미 존재하는 가족 유형을 포함해 어떤 형태의 가족도 존재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지원해야 한다.

북유럽 친구들에게 결혼에 대해 물어봤다. 셋째를 임신하고 혼인신고를 했다는 친구는 상속권 때문에 했다고 답했다. 10년이 넘도록 남자친구와 행복하게 사는 친구는 이혼하는 게 귀찮을 것 같아서 안 했고,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틈만 나면 피크닉을 가는 친구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행정적으로 아무런 불편이 없다고 했다. 모두 법이 인정하는 가족이다. 다들 결혼은 선택지의 하나일 뿐 살면서 누구도 혼인 여부에 대해 묻지도 상관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결혼으로 묶어야만 가족일까? 가족처럼 살면 가족 아닌가?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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