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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나는 열여섯 살 고등학생으로 그곳에 있었다.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귀를 때렸고 순식간에 사방에 하얀 연기가 자욱했다. 시민들은 아스팔트 위에서 신음하며 뒹굴었고, 시청에서 숭례문으로, 남산도서관 쪽으로 밀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권력이 뿌린 독가스에 굴하지 않고 저항했다. “독재타도!”를 외치며 폭력국가의 전경대오에 맞서고 있었다.

 

2016년 11월. 나는 그때와 같은 곳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물러나라!”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 40년은 국가와 시민의 권력 균형을 바꿔놓았다. 시민들은 진지했지만 무겁지 않았고, 분노했지만 자신감이 있었다. 촛불의 행렬은 숭례문에서 시청으로, 경복궁으로 올라가 청와대를 에워싸고 누가 이 나라의 주권자인지를 알려줬다. 시민의 권력이 불법국가를 압도했다.

 

국가와 시민, 현대 민주주의는 이 두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와 같다. 한쪽 바퀴가 헌법체제와 대의정치를 교차시켜 만든 제도 민주주의라면, 다른 바퀴는 투표권과 집회·시위·결사·표현의 자유를 쟁취한 시민들의 참여 민주주의다. 한쪽 바퀴라도 고장 나면 민주주의는 비틀거린다. 그래서 한쪽이 약하면 다른 쪽이라도 수레를 지탱해야 한다. 시민사회에 민주적 토양이 약하면 제도 권력이라도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고, 제도 권력이 비민주적이면 시민의 손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1987년과 2016년의 거대한 시민행동은 한국 민주주의가 어느 쪽 바퀴로 굴러왔는지를 말해준다. 1987년 항쟁의 핵심 요구사항은 ‘대통령 직선제’, 즉 국민의 대표자를 국민의 손으로 선출한다는 것이었다. 2016년 항쟁의 정신은 국민이 뽑은 대표자라도 헌법과 법치를 훼손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면 국민의 손으로 권력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이끌고 온 힘은 바로 이러한 시민사회의 강력한 정치적 에너지였다.

 

그것은 비단 1987년과 2016년에 국한되지 않는다. 1960년 4월혁명, 1980년 5월항쟁, 1987년 6월항쟁,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 2008년 이명박 정권 반대 촛불집회,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은 몇 번이나 최고통치자의 운명을 좌우했다. 이처럼 이 나라는 매우 강하고 질긴 시민항쟁의 전통을 갖고 있다. 2016년 촛불항쟁은 그 긴 역사적 파동에 또 한 번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시민정치라는 한쪽 바퀴로만 계속 굴러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한국 정치에서 시민항쟁이 그토록 중요했다는 것은 국가 내에 민주주의를 존중하지 않는 세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방증한다. 국가 내에 민주적·민중적 리더십이 취약한 채로 대중항쟁만 반복될 경우, 그 혁명적 에너지를 지배집단의 한 분파가 이용해 구질서를 자신에게 이롭게 일부 변형하여 복고시킬 수 있다. 쉽게 말해, 죽 쒀서 개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적 국가권력과 민주적 시민사회의 두 바퀴로 굴러가는 민주주의를 만들 때까지 우리 모두 깨어 있어야 한다. 국가기구 전반에 걸쳐 인적 청산과 세력 교체를 이뤄내고, 법치와 민의를 왜곡하는 독소 제도를 도려내고, 검경·국정원·감사원 등 정권이 국가를 사유화하는 도구로 사용해온 핵심 기관을 개혁하는 길은 멀고도 멀다.

 

그런 의미에서 2016년 시민항쟁은 아직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동안 대한민국의 국가를 사유화해 온 견고한 지배구조에 균열을 내고 변화를 위한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이제 문을 크게 열어젖히고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지금 중요한 일은 시민들이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점차 실체를 드러내는 불법, 부패, 수탈 세력의 실체를 정확히 인지하고 널리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제 타파와 더 나은 대한민국을 열망하는 의지가 옅어지지 않았음을 집중된 대규모 행동으로 재차 확인시켜줘야 한다. 그러한 실천을 통해 변화를 염원하는 압도적 여론을 만들어갈 수 있다. 시민들이 힘 있는 자들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큰 자원은 바로 말과 글과 행동으로 외화된 객관적 민의, 투표용지로 변환될 수 있는 실체적 민의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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