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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국민참여재판이 부당한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공격의 주체는 새누리당 일부 의원들과 보수언론들. 그들 주장의 요지는 법이론도 모르고 냉정한 사리판단을 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미성숙한 시민들이 재판에 참여해 비합리적인 재판결과를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요구사항은 사회적·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의 재판을 시민들의 손에 맡겨서는 안된다는 것, 나아가 국민참여재판을 축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나꼼수’ 사건에 대한 배심원단 다수의 무죄평결, 그리고 안도현 시인에 대한 배심원단의 만장일치 무죄평결이 그 시발점이 됐다. 배심원단을 우민시하고 이들의 판단을 감성재판, 여론에 휩쓸린 재판이라고 호도하는 그들의 주장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우리나라는 2008년 법정에서의 국민주권 실현과 투명성 강화 그리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재판의 실현을 위해 국민참여재판을 도입했다. 유럽에서 시민참여재판의 역사가 1000년이 넘고, 유럽·영미권 국가 등 대다수의 문명국가에서 시민참여재판을 시행해 오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참여재판 시행은 만시지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이 재판에 앞서 선서를 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우리 헌법이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천명하고 있음에도 과거 국민들은 직업법조인들의 전용공간이었던 법정에서 단순한 심판의 객체에 불과했다. 직업법관들이 재판권을 독점한 상황에서 국민의 건전한 상식과 정의 관념에 반하는 많은 판결들이 쏟아졌고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옥살이를 한 수많은 사법 피해자가 양산됐다. 수사기관이 꾸민 조서를 중시하는 재판으로 인해 공판중심주의가 실종됐고, 전관예우 관행으로 인해 진실이 왜곡된 재판도 많았다. 소위 ‘법조인의 직업적 양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이 모든 부작용들의 주된 원인이 바로 직업법조인들만이 법정을 독차지한 데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국민들이 사법권의 주체요, 감시자로 재판에 참여함으로써 재판권의 행사가 보다 민주화·투명화되었으며 일반 국민들의 건전한 상식과 법감정이 판결에 반영될 수 있게 됐다. 영국이 이미 중세시대인 1215년 대헌장에서 ‘시민들은 법률과 동료시민들의 판결에 의해서만 인신이 구속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이나, 미국이 뛰어난 사법체계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직업법조인들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형사재판에서 동료시민들에 의한 배심재판을 받을 권리를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것은 결국 재판권도 국민들의 통제하에 놓일 때만이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1968년 미국의 화이트대법관은 배심제도를 가리켜 ‘피고인을 부패하거나 과욕이 넘치는 검사, 정부권력에 순종하거나 편견을 가지고 있는 판사로부터 방어해 주는 보호장치’라고 설파했다.


그간의 행적을 보면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과 보수언론이 비단 국민참여재판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비록 법관에 의한 판결이라 할지라도 그 선고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좌편향 판사’ ‘튀는 판사’ ‘함량미달 판사’ 운운하며 비난을 쏟아내고 재판의 독립을 침해하는 경고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 막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시대’, ‘국민에 의해 정의가 실현되는 시대’의 도래가 아닐까.


입으로는 항상 국민들을 이야기하고 국민의 공복을 자처하지만 실상은 국민들을 어리석다하고 국민들을 다스림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그들이야말로 21세기 한국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함량미달인 존재들이 아닐까. 이제 막 정착되기 시작한 국민참여재판이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성원 속에 쑥쑥 성장해 사법영역의 민주화 촉진과 올바른 사법정의 실현의 견인차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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