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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을 가진 나라라면 어디서나 직면하는 과제가 있다. 고준위 방폐장 건설이다. 원자력 발전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질이라는 사용후핵연료를 남기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든 처분해야 한다. 한국에도 사용후핵연료 1만5000t이 쌓여 있다. 현 정부의 탈원전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된다 해도 월성원전은 2021년이면 임시 저장시설이 포화 상태에 이르는데 막상 처분할 곳이 없다. 

한국에서 원자력은 1962년 제3의 불로 등장했으나 56년이 지난 지금은 고준위 방폐장 문제를 남기며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발등의 불이 됐다. 우리는 중저준위 방폐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과 분쟁에 직면했다. 고준위 방폐장 건설이 가져올 파장은 가히 국가적 난제라 할 만하다. 이미 2016년 마련된 고준위 방폐물 관리 기본계획을 현 정부가 굳이 재검토하기로 결정한 이유도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일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고준위 방폐장 건설로 향하는 여정이 좌초될 수 있다는 현실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합의의 기술은 제도 설계도 포함한다.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의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제도 설계 원칙은 뭘까? 우선 세 가지를 짚어볼 수 있다.

첫째, 공론화는 정부 정책에 대한 찬반 논란이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데 집중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이해당사자 간 합의를 통한 정확하고 균형 있는 정보 공개가 필수다. 원전의 위험성을 축소해서도 안되지만 원전의 위험성만을 과장해서도 안된다. ‘길들였다고 믿은 야수, 고질라’ ‘페라리 엔진을 장착한 두발 자전거’ ‘속도 제한 시속 60마일에 묶여 있는 고속도로에서 시속 600마일로 달리는 고성능 슈퍼카’ 등의 은유는 원자력의 양면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균형 잡힌 인식을 대변한다. ‘불과 같아서 하인일 때는 한없이 충직하지만 주인이 되면 한없이 나쁜 존재’가 원자력이라는 비유는 또 어떤가. 원자력에 대한 찬반 입장과 무관하게 원하는 정보만 취사선택하는 확증편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둘째, 가치논쟁으로 비화하지 않고 다양한 선택지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과 선호를 최대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용후핵연료 관리방안을 최대한 다양하게 펼쳐놓고 그 장단점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제시하며 AHP, CVM, DEA 등의 다양한 과학적 조사 기법을 활용해 참여자들의 상대화된 인식을 측정해야 한다. 이렇게 정교한 조사방법이 동원되면 공론화위원회가 결과를 재해석하거나 공론화 과정에서 논의되지 않은 사항들을 추가로 언급할 필요가 없어져 공론화의 정당성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된다. 

셋째, 공론 형성과 파악은 이해당사자 간 이해 조정과 다른 차원의 활동임을 인식하고 전자는 공론화위원회가, 후자는 정부가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가 공론화 결과를 존중해 문제를 파악하고 정책 결정과 정책 형성 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정책 결정의 유일한 근거로 공론화 결과를 이용해서도 안되며 그 과정에서 섣부른 이해 조정을 시도해서도 안된다.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이해를 조정하고 다수와 소수 사이에 합의를 구축하는 것은 공론화 후에 이어지는 긴 정책과정에서 정부가 책임지고 진행해야 할 국가사무이다.

<은재호 | 한국갈등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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