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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등판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초반부 일부를 퍼온 것이다. 임란을 일으킨 왜적은 무술년(1598) 노량 앞바다에서 칼의 울음소리가 밴 허무한 노랫말을 남기고 그렇게 물러났다.

무술년 다음이라 그런지 기해년인 올해도 사나운 칼의 노래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이런 힘겨운 시절에 민초들은 지치고 힘든 여정을 칼의 노래를 들으면서 한풀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 그러고는 노랫말만 가지고 섣부른 평가를 내리기도 하는 것을 본다. 

국정농단에서 출발하여 사법농단, 조국 일가를 거쳐 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 수사로 이어진 서초동발 칼의 노래가 여전히 드세다. 칼이 스칠 때마다 보기 드문 흥행이 계속되었다. 시민의 눈에는 우리 사회가 흡사 거대한 불합리의 온상같이 비친다.

최고 권력자 여럿을 칼끝에 거두는 검찰의 빼어난 솜씨에 관중들의 눈높이도 높아져 여간해서는 관심을 끌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불구경, 싸움구경을 남의 일인 양 마냥 즐거워만 하는 그런 관중이 아니다. 관중들은 지금껏 학습효과로 관전 포인트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고 칼끝의 지향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올랐다.

한편으로는 검찰의 예리한 칼날이 너무 빈번히 무대에 오르는 모습들에 겁나하면서도 식상해하기 시작하였다. 사회의 곪은 부분을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칼끝의 숨은 방향이 헷갈려서다. 검찰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칼을 휘두른다는 의구심을 떨칠 길 없기 때문이다.

법률직의 영역은 결과에서 가치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생산재라기보다는 소비재 영역에 가깝다. 그런 음(陰)의 재화를 두고 온 눈이 서초동으로 쏠리고 칼춤의 향방에 따라 경쟁하듯 내 편 네 편으로 갈리고 있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의 자체 여과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시시비비를 검찰의 칼에 의존하고 있음을 본다. 심지어 예술작품의 진위까지도 그러한 데서는 할 말을 잃는다. 이런 기이한 현실에서 검찰은 만능자로서 역할을 요청받고 있다. 오죽하면 검찰이 바로 서면 나라가 바로 선다는 전직 대통령의 말이 검찰의 선도적 역할론으로 회자되고 있겠는가.

이래선 안된다. 국민들은 눈앞의 소모적 액션극에서 벗어나 생산적인 모습을 바란다. 추운 계절에 몸도 마음도 얼어붙었다. 따듯한 정이 돌고 밝은 앞날을 기약할 수 있는 평온한 공동체가 그립다.

지난 몇 달 동안 서초동에서는 서초동연가(戀歌)가 메아리치고 광화문에서는 광화문연가로 뒤덮였다. 또 최근에는 서초동에서도 두 갈래 서로 다른 연가가 불협화음을 엮어내고 있다. 평범한 시민들의 눈에는 이들 길거리 연가가 칼의 노래와 뒤섞여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울어대는 칼의 노래와 칼춤에 넌더리가 난다. 이제 그런 유의 노래라면 입에 담기도 싫고 그런 장단의 춤이라면 작은 춤사위도 싫다. 국민이 쥐여준 칼이다. 흥행에 눈독 들이지 말고 절제된 겸손미를 갖추어 사용토록 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의 칼끝은 내부가 아니라 오로지 불법을 자행한 침략자를 향해 있었다.

<최영승 | 대한법무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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