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부 시인은 ‘봄’이란 시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고 했던가. 대학의 봄은 개나리가 아닌 신입생과 함께 온다. 그러나 코로나19 때문에 연기된 개강은 그마저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그 봄은 요원하기만 하다. 

개강 후 한 주 지났을 때 입학식이 취소돼 얼굴도 본 적 없는 한 신입생에게서 면담하고 싶다는 e메일이 왔다. 무슨 사정일까 궁금했는데 뜻밖에도 자퇴하겠다고 했다. 얼마나 어렵게 들어온 로스쿨인데 제대로 시작도 안 해 보고 자퇴라니…. 

장학금 수혜 대상자인 K군의 사정은 이랬다. 지방 소도시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는 부모님은 코로나19 사태로 지난 두 달간 수입이 거의 없어 임대료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며, 중소기업에 다니는 동생은 최근 무급 강제휴직을 당했다고 한다. 조부모까지 함께 사는데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해결한다고 해도 원룸 월세, 식비, 책값 등 최소 월 120만원을 부모님께 지원받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K군의 진정한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지난 2월 대학 졸업 후 약사 자격증을 갖게 된 K군은 당장이라도 응급실에 취업하면 가계를 돌볼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로스쿨에 다닌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퇴하고 가족을 돌볼 것인가, 이를 외면하고 로스쿨에 다닐 것인가로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이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K군을 붙잡고 싶었다. 이런 학생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법률가 상이 아닐까 생각해서다. 하루만 더 고민해보자고 한 후, 학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하면 도울 길을 찾아보겠다며 돌려보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안 돼 행정실에서 자퇴서를 받아갔다는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이 바빠졌다. 자퇴를 막기 위해서는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순간 두 사람이 떠올랐다(둘 다 변호사다).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바로 돕겠다고 했다. 한 사람은 30만원을 더해 월 150만원을, 그것도 3년치를 일시불로 지원하겠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K군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적절한 일감을 주겠다는 배려까지 했다. 월 270만원이라는 든든한 지원금을 확보한 나는 K군에게 바로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약속한 다음 날 K군에게서 온 e메일은 나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었다. K군은 “270만원은 사회초년생들의 월 평균 수입을 넘는 큰돈입니다. 스스로 경제적 부양 능력이 있음에도 교수님께 먼저 사정을 알렸다는 이유만으로 더 어려운 학우에게 돌아가야 할 호의를 가져가는 것은 정말 염치없는 일입니다”라며 사양했다. 그는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이라며 법률가의 길을 재도전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백양로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로 맺었다.

든든한 후원자가 생겨 K군은 자신과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고 로스쿨에 다닐 수 있게 됐는데…. 기대와 안타까움이 교차했던 나의 생각은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는 K군의 어른스러움 앞에 유치한 계산이 되고 말았다. 

K군을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다만 회신에서 짧은 만남이었지만 K군을 제자로 생각하고 싶다고 썼다. 이어서 K군의 사정을 듣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바로 돕겠다고 나선 두 변호사에게도 하루 사이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감사를 전했다. K군의 말처럼 이 세상이 따뜻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으니 그들은 기부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새 신입생이 아니게 됐지만 K군은 코로나를 뚫고 온 새봄이었다.

<남형두 |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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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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