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불편하거나 두려운 장면이 있다. 힘센 집단이 개인을 곤궁에 빠뜨리는 장면이다. 화난 채 혹은 낄낄대며,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 수군대며 왕따를 시킨다. 몸을 혹사시키고 기회에서 배제시킨다. 나는 큰 집단이 개인에게 겁주는 곳이 늘 싫었다. 그런 사회는 개인들이 집단 속에서 존재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 그곳은 공리적 이익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권리를 간섭하고 통제하며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소름까지 돋으며 고통스럽게 읽은 기억을 갖고 있다. 과학, 사랑, 행복, 자유, 언어를 왜곡하고 개인마다 무력하게 위축시키는 집단의 광기를 끔찍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언어의 생성과 죽음, 말과 글을 통제하며 개인의 삶과 사회적 의사소통체제를 억압하는 과정에 호기심을 갖는 연구자에게 이 작품은 여러 고전 중에서도 최고일 것이다.

소설 <1984>에서 당(국가)은 ‘개인됨’을 허락하지 않으며, ‘새로운 언어’(New Speak)위원회는 사회구성원이 사용하는 언어까지 간섭하며 심지어 외국어 공부조차 통제한다. 당은 “누구든 외국인들과 접촉하면 그들도 자신과 비슷한 인간이고, 그들에 대해 들어온 이야기 대부분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결과 그가 살고 있는 폐쇄된 사회가 붕괴되고 사기의 밑바탕이 되었던 공포, 증오, 독선이 고갈되어 버리는 것”을 염려하고 있다. 그렇다. 다른 말과 글을 보고 듣고 배우면 다른 생각이나 삶의 방식에 노출된다. 그렇게 되면 독선의 집단이 유지되기 어렵다. 

우리의 언어사회는 어떤가? 이곳은 어떤 언어든 자유롭게 사용하고,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곳 아니었던가. 사무실, 식당, 회의장에서 내 언어를 침묵시키거나, 혹은 위선적인 말과 글로 살아가다 잠자리에 들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는 &lt;1984&gt;의 윈스턴이 우리 중에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있을 때 텔레스크린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고백이 북한 사회에서나 있을 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런데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는 칼럼을 썼다고 해당 신문사와 교수를 고발한 여당의 기세등등함을 보니 내가 뭘 잘못 생각했는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언어는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는 언어를 구성한다. 그런데 힘이 센 어디선가 언어를 만드는 누군가를 손본다고 알려지면 개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누구든 위축된다. 내 위에 군림하는 부적절함에 대해 저항심을 갖기 부담스럽다. 불편하고 부적절하다고 적거나 말하는 것도 망설여진다. 윈스턴의 심문자인 오브라이언이 말했다. “개인은 유한하나 국가는 불멸”이라고. 그가 말한 국가는 사랑도, 미술도, 문학도 사라지고,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분도 없어지는 곳이며, 권력을 향한 도취감, 승리감의 전율, 무력한 적을 짓밟는 쾌감을 얻으며 살아가는 전체주의 사회였다. 이 나라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자. 그래도 신문 칼럼만으로 거대 정당이 화가 나서 검찰에 고발하는 것을 목격하며 왠지 모를 서늘함을 느끼는 건 나만일까. 

정치담화에 재갈을 물린 곳에선 무엇이 허락되는가? 윈스턴이 관찰한 <1984>의 그곳은 “이웃과의 사소한 말다툼, 맥주, 축구, 도박, 엉뚱한 곳을 겨냥하여 투정을 부리는 것”이 넘친다. 그곳은 결코 좋은 언어사회가 아니다.

<신동일 |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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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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