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롯해 기자란 직업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달력을 좋아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달력이라는 물건보다 ‘계기가 있는 날’을 좋아한다. 그날 발생한 사건·사고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스트레이트 기사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사안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기사를 쓰려면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계기를 가장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달력이다. 업계 용어로 흔히 ‘카렌다 아이템’이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아이폰이 세상에 나온 지 10년을 계기로 혁신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박종철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을 계기로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다시 짚어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타이밍은 이른바 ‘꺾이는 해’다. 3주기, 4주기보다는 ‘5주기’, 8주기나 9주기보다는 ‘10주기’가 뭔가 더 있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 말은 출판 담당 기자에게 꽤 괜찮은 시기였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즉 ‘2010년대의 책’을 꼽아보기에 아주 적당했다. 당대에 주목받고, 사랑받았던 책들은 그 시대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경향신문이 지난 10년간 주요하게 다뤘던 책들을 다시 들춰보고, 출판평론가 등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대형서점에 자료를 요청해 2010년대의 베스트셀러 목록도 정리했다. 2010년대의 ‘좋은 책’과 ‘잘 팔린 책’을 동시에 선정해 정리해보기로 했다.

그간 책 기사를 써오면서 가장 고민한 것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였다. 언론이 ‘좋은 책’이라고 판단해 열심히 읽고 소개한 책들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반면 베스트셀러 상단에 있어, 다시 찾아본 책들은 내 기준으로는 그리 좋은 책이 아니었다. ‘팔리는 책’이 다 좋은 책은 아니다라고 자위하면서도 씁쓸했다.

10년을 통째로 들여다보니 그런 고민은 소용이 없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선정해 신문독자들에게 권한 책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간, 그러니까 많은 독자들이 사랑한 책도 다 의미가 있었다. (내가 고른) 좋은 책이든, 잘 팔리는 책이든 모두 한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경향신문이 선정한 2010년대의 책’으로 뽑힌 <정의란 무엇인가>와 <아픔이 길이 되려면> <골든 아워><21세기 자본> <법률가들> <피로사회> <금요일엔 돌아오렴> <백래시> 등을 보니 그간 한국 사회를 달군 이슈를 알 수 있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미움받을 용기><언어의 온도>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여행의 이유> 등 연도별로 가장 많이 팔린 책 목록에서는 2010년대 한국을 살아간 사람들의 고단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어찌됐든 다행이다. 그간 나름 심혈을 기울여 해온 일들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내가 선정한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일은 별로 없겠지만, 10년 뒤에 돌아보면 그 책들이 과거를 기억하는 작은 단초는 될 것이다.

다만 조금이나마 욕심을 부리고 싶은 일은 있다. 2019년에 주요하게 다룬 책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이나 숙제를 반영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일상에 뿌리박힌 차별 문제를 다뤘고 <20vs80의 사회>는 불평등 문제를,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청소년노동 문제를 지적했다. 매주 ‘무거운 책’을 독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내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2020년에는 작년보다는 더 밝고 희망적인 책을 소개하고 싶다. 지금 무거운 책을 쓰고 있는 저자들도 변화된 사회를 보고, 희망적인 내용으로 원고를 고쳤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책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는 소식을 전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지금은 희망을 꿈꾸기에 가장 적당한 1월이니까.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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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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