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의 <떨림과 울림>, 윤태웅의 <떨리는 게 정상이다>, 존경하는 두 저자가 작년에 낸 멋진 책이다. 둘 다, 제목에 ‘떨림’이 등장한다. 어쩔 수 없는 물리학자인 필자는, 김상욱의 ‘떨림’은 물리학의 ‘진동(振動)’, 윤태웅의 ‘떨림’은 물리학의 ‘요동(搖動)’으로 읽었다.(이유가 궁금하면 두 책을 꼭 읽어 보라. 둘 다 좋은 책이다.) 살면서 우리는 자주 떤다. 추운 날에는 몸도 떨고 이도 떤다. 어렵게 통과한 서류 심사 후, 취업 면접을 앞둔 대기실의 떨림도 있다. 사랑하는 이가 이제나저제나 오기를 기다릴 때, 설렘도 떨림이다. 큰 변화의 와중에는 사회도 떤다. 사람들이 들썩들썩 가만있지 못한다. 통계물리학에서도 ‘떨림’은 무척 중요하다. 특히,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때 그렇다.

온도가 높이 오르면 막대자석의 자성이 없어진다. 얼음은 녹아 물이 되고, 물은 끓어 수증기가 된다. 물질의 거시적인 상태가 급격히 변하는 것이 통계물리학의 상전이다. 액체인 물속 물 분자나, 기체인 수증기 안 물 분자나, 똑같은 물 분자다. 비록 우리가 스냅사진을 찍어 볼 수 있다 해도, 독사진만으로는 사진 찍힌 물 분자가 물속에 있는 친군지, 수증기 속 친군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른 여러 친구 물 분자가 함께한 단체사진을 찍어봐야 안다. 물인지, 수증기인지는 물 분자 하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물 분자가 서로 맺고 있는 관계가 만드는 거시적인 구성(혹은 짜임)에 대한 얘기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제와 다름없는 난데, 어느 날 아침 다른 세상에서 눈을 뜬 격변의 경험이 우리 현대사에 여러 번 있었다. 역사가 도도히 흐르는 큰 강물이라면, 우리 한 사람은 강물에 몸을 맡겨 떠내려가는 나뭇잎이 아니다. 연약하기로는 나뭇잎과 다를 것 하나 없어도, 큰 강물을 이루는 작은 물방울이 바로 우리다. 하나하나는 보잘것없이 작아도, 모여서 함께 큰 강물로 흘러 세상을 바꾼다. 우리가 역사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막대자석도 마찬가지다. 큰 자석 안에는 ‘스핀’이라 부르는 엄청나게 많은 작은 원자자석이 들어 있다. 원자자석 하나는 강물의 물방울을 닮았다. 모든 물방울이 같은 방향으로 함께 움직여 강물의 큰 흐름을 만들 듯, 작은 원자자석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같이 똑같은 방향으로 팔을 뻗어 앞으로나란히를 하면, 큰 자석 전체가 강한 자성을 갖게 된다. 한편, 작은 원자자석들이 제각각 다른 방향을 뒤죽박죽 가리키면 막대자석은 거시적인 크기의 자성을 갖지 못한다. 낮은 온도에서 시작해 온도가 점점 오르면, 낮은 온도에서는 컸던 막대자석의 자성이 특정한 임계온도에서 사라져 0이 되는 상전이가 일어난다. 이때 관찰되는 흥미로운 임계현상(고비현상)이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떨림’의 크기가 무한대로 발산한다는 거다. 상전이가 일어날 때, 자성은 한 값으로 딱 정해지지 않는다. 시간에 따라 큰 폭으로 격렬하게 요동한다. 격변의 상전이를 겪을 때 사회도 이처럼 몸살을 앓는다. 엄청난 떨림을 겪는다. 물리나 사회나, 커다란 변화는 엄청난 떨림과 함께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윤동주 ‘서시’의 문장이다. 시인은 이처럼 외부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가슴으로 삶을 앓는다. 우리가 시인들을 탄광의 민감한 카나리아로 비유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통계물리학에서도 민감도를 얘기한다(물리학 용어는 감수율(susceptibility)이지만 쉽게 바꿔 불러봤다). 외부의 작은 자극에 얼마나 크게 반응하는지를 잰다. 막대자석의 경우라면, 외부에서 작은 자기장을 걸어주었을 때, 막대자석의 자성이 얼마나 변하는지를 재서, 그 비를 구하면 그 값이 민감도다. 이렇게 정의하고는 ‘서시’의 문장으로 시인의 민감도를 측정하면, 그 값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시인의 가슴속 큰 괴로움을 잎새에 이는 약한 바람의 세기로 나누니, 그 값이 아주 클 수밖에. 

통계물리학에 ‘요동-흩어지기 정리’라는 것이 있다. 막대자석의 자성이 얼마나 크게 요동하고 있는지, 즉 ‘떨림’의 정도를 자성값(M)의 분산(제곱의 평균에서 평균의 제곱을 뺀 값)을 이용해 정량적으로 잴 수 있다. 또, 외부에서 걸어주는 자기장의 변화량에 따라 자석의 자성이 얼마나 변하는지를 구해 그 비를 재면, 그 값이 바로 민감도다. ‘요동-흩어지기 정리’는 바로, 떨림의 크기가 민감도에 비례한다는 통계물리학의 아름다운 이론이다. 오늘 필자가 사용하는 용어로 바꾸면 ‘떨림-민감 정리’라 할 수도 있겠다. 크게 떨 때 민감하고, 둔감하면 떨림도 없다. 

윤태웅의 <떨리는 게 정상이야>에 유명한 지남철 얘기가 있다. 떨지 않아 한 방향만을 꼼짝 않고 가리키는 지남철로는 북쪽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지남철이 떨고 있을 때에만, 우리는 지남철이 향하는 방향을 북쪽으로 신뢰할 수 있다. 통계물리학도 마찬가지 얘기를 한다. 크게 떨고 있을 때에만,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함께 사는 우리 사회에서, 떨리는 게 정상이니, 민감해야 정상이다. 

상전이가 일어날 때, 자석의 자성은 큰 떨림을 보여준다. 떨림의 크기가 무한대로 발산한다. 위에서 소개한 ‘떨림-민감 정리’를 이용하면, 민감도가 떨림의 크기에 비례하니, 상전이가 일어날 때 민감도도 함께 무한대로 발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전이의 격변기에 떨림의 크기와 민감도는 함께 무한대가 된다. 우연히 발견된 작은 태블릿 하나가 민감한 불씨가 되어, 큰 분노의 떨림을 만들어 결국 세상을 바꿨다. 혼자서 따로 떤 것이 아니었다. 연결된 여럿의 민감한 떨림이 강물로 모여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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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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