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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곳곳서 산새 지저귀니 온 나무가 향기롭다.”

퇴계 이황의 시구다. 여기서 산새는 퇴계 자신을 가리킨다. 온 나무는 온 산을 뜻하고 온 산은 온 세상의 비유다. 자신이 말을 하니 온 세상이 인문의 향기로 그윽해진다는 뜻이다. 퇴계의 큰마음이 드러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퇴계는 왜 자신을 산새에 비겼을까?

공자는 특유의 나이 담론을 펼치면서 예순이 되면 ‘이순’하게 된다고 하였다. 한자로 ‘耳順’이라 쓰는 이 말은 글자 그대로 풀면 ‘귀가 순조롭다’라는 뜻이다. 참으로 무슨 뜻인지 아리송한 말이다. 게다가 역대의 해설마저 알 듯 말 듯 하다. 이런 식이다. “귀로 들으면 그 오묘한 뜻을 안다.” 2세기 무렵의 대학자 정현의 풀이다.

귀는 주지하듯 감각기관이다. 그런데도 귀로 듣는 순간 바로 알아차린다고 한다. 그것도 오묘한 뜻을 말이다. 사람이 신이 아닌 만큼 듣기만 해도 심오한 뜻이 절로 깨달아진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리라. 그럼에도 주희도 비슷하게 말한다. “소리가 들어와 마음에 통하여 어긋나거나 거스르는 바가 없게 되면 앎이 지극해지고 생각하지 않아도 깨닫게 된다”라고. 이순은 이렇듯 ‘생각하지 않아도 깨달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생각하지 않아도 깨닫는 걸까? 주희의 말대로라면 무슨 소리를 듣든 마음이 그것과 충돌하거나 엇나가지 않으면 된다. 마음이 무언가에 붙들려 있으면 귀에 들어오는 소리와 부딪히고 틀어지게 된다. 이러한 마음 상태를 일러 마음이 무언가에 길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 무언가를 고수하는 것은 그것에 익숙해졌다는 것이고, 이를 마음이 무언가에 길들여졌다고 비유할 수 있기에 그렇다.

퇴계는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라는 뜻에서 자신을 산새에 비겼다. 마음에 길들여진 바가 없는 삶을 지향했음이다. 생각하지 않아도 깨닫게 됨이 목표가 아니라 마음에 길들여진 바가 없도록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삶을 도모했다는 얘기다. 자기가 듣고 보고 싶은 것에 길들여진 세상. 하여 ‘길들여진 나’가 진짜 나인 줄로 착각하며 살아감에도 떵떵거릴 수 있는 시절. ‘산새’ 퇴계가 오늘날에도 큰 스승인 까닭이다.

김월회 |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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