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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김택근의 묵언]봄날은 간다

경향 신문 2019. 4. 29. 13:43

바람이 분다. 나무로부터 사람에게로, 김소월로부터 진달래꽃으로, 사랑으로부터 슬픔에게로 바람이 분다. 우리를 앞질러간 봄은 흰 조팝나무 꽃 속에 숨었다. 봄은 슬프다. 하나의 꽃이 피는 것은 개벽(開闢)이지만 꽃들의 잔치는 혁명이 될 수 없다. 나비 한 마리가 조팝나무 꽃을 뒤져서 겨우 남아있는 한 줌의 봄을 끌어내고 있다. 날개 위에 실린 봄이 위태롭다. 다시 바람이 불고, 나비를 좇던 마음까지 나풀거린다. 그렇다. 우리 사랑 또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  

꽃이 진다. 황홀하게 세상을 밝히고 떨어지는 잎 잎 잎……. 어디에도 꽃잎이 떨어진다. 우리네 슬픔이 스며있는 작은 못에도 꽃잎이 떨어진다. 분홍빛 작은 파문이 일면 눈물을 다 쏟아버린 슬픔이 희미하게 웃는다. 이맘때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노래 ‘봄날은 간다’는 아프다.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다. 1953년 백설희가 처음 부른 후 예순 여섯 번의 봄이 지나갔다. 꽃은 남쪽에서부터 진다. 꽃이 피어올라온 속도로 봄은 또 그렇게 가고 있다. ‘봄날은 간다’ 노랫말이 가슴으로 스며들 때면 우리네 삶은 봄날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도 우정도 정점이 지나가야 제대로 보인다.  

꽃잎이 날리는 밤, 이 노래를 부르며 친구가 울었다. 기억이 닳아서 희미하지만, 서울 남산 아래 대폿집 골목이 아니라면 인사동 골목이었을 것이다. 친구의 울음 섞인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친구가 왜 울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봄날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친구는 올해도 봄의 끝자락을 붙들고 울 것이다. 지금 그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꽃그늘에 앉아 향기에 취했던 시간은 그저 꿈만 같다. 봄날이 아무리 좋아도 그 속에 마냥 머물 수는 없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면 내 안의 상처들도 날린다. 신음 소리를 다 풀어버린 아픔들이 휘날린다. 야무진 햇살이 내려와 오래된 고통을 뒤집는다. 한나절의 풍장(風葬)이다. 문득 바람을 당기면 저만치 옛 기억들이 살아난다. 

멀리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아지랑이는 봄의 멀미, 아른거림 속에서 잊어버렸거나 잃어버렸던 것들이 붉은 옷을 입는다. 돌아보면 어지러웠다. 눈물겨웠다. 숨 막혔다. 울컥울컥, 느릿느릿 젊은 날의 내가 다가온다.  

“순이네가 사는 집 지붕 위에선/ 순이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복동이가 사는 집 지붕 위에선/복동이네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누이야 네 수놓는 방에서는/ 네 수놓는 아지랑이/ 네 두 눈에 맑은 눈물방울이 고이면/ 맑은 눈물방울이 고이는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그립다’ 생각하면/ ‘그립다’ 생각하는 아지랑이/ ‘아!’ 하고 또 속으로 소리치면/ ‘아!’ 하고 또 속으로 소리치는 아지랑이//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섧고도 어지러운 사랑의 모습처럼/ 여릿여릿 흔들리며 피어오른다”(서정주 ‘아지랑이’)

고등어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손톱을 깎고 있는데, 점심을 먹고 졸고 있는데, 은행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는데 문득 창밖의 봄날이 환장하게 곱다. 그럴수록 봄에 비친 내 모습은 남루하다. 사랑도 명예도 봄볕에 비춰보니 노래 한 소절보다도 못하다. 도대체 내가 이룬 것은 무엇인가. 나는 시대의 어디에 걸려있는가.

우리는 서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다. 갑자기 늙는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면 중늙은이 하나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젊은 날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살아있는 동안 몇 번의 봄을 맞을 것인가. 또 한걸음 멀어진 내 청춘은 어디쯤에서 서성거리고 있을까. 눈물 젖은 과거는 눈물 없는 곳으로 흘려보내야 하리.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시 가는 봄이 서러워 눈물이 나는 것을.

그대가 머물고 있는 마을에도 볕이 고운가. 이렇듯 환한 날에는 그대의 그리움이 보인다. 문득 보고 싶다. 초록별 속에서는 중력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서 시나브로 늙어가고 있다. 그대 오늘도 지구인으로, 한국인으로 무사한가. 잘 것이 없으니 모난 것들을 지우고 술 한잔 건네고 싶다.   

사랑도 미움도 때가 되면 떠난다. 누가 떠나고 있기에, 무엇이 지고 있기에 이리도 아픈가. 신열이 멎을 때쯤에는 꽃 진 자리에서 실컷 울 수 있을까. 

저 신록에 섞이려면 다시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풀 옷 하나 걸치지 못한 나는 누구인가. 나만 빠뜨리고 봄은 언덕을 넘어 숲속으로 사라진다. 봄날은 간다.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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