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을 읽었다. 읽을 때마다 구성이 정교해서 놀라고 묘사가 독특해서 놀란다. 이야기는 비극적이지만, 비극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날카로운 빛살이 있다. 그 빛살은 우리에게 쏟아지면서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다. 신분 제도와 가부장제 등 크고 굳건한 것 앞에서 개개인은 작고 허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작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모여 사는 작은 것들이 없는 한, 큰 것의 의미도 사라진다.

큰 것 앞에서는 으레 압도당하고 고개 숙이게 되고 몸을 낮추게 된다. 관습과 종교 앞에서 우리는 위축된다. 큰 것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믿음 없이 축적이 불가능하다. 믿음은 편견으로 둔갑해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기도 하고 때때로 폭력이 되기도 한다. 사랑을 가로막기도 하고 원하는 곳에 발 들일 수 없게 만든다. 사람은 큰 것 앞에서 하릴없이 무너져 내린다. 큰 것을 꿈꾸고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사는 삶이 빡빡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늘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 작은 것을 보면 우리는 다가가고 그것과 교감하기 위해 마음을 열어젖힌다.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을 보면 들여다보게 된다.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개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나무 아래서 나뭇잎과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속에서 어떤 것이 피어오르는 게 느껴진다.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 쓸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순간의 중심에 있었던 나는 안다. 그게 얼마나 충만한 경험이었는지, 그 순간의 전후에 나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작은 것들의 반짝임처럼, 그 반짝임이 모이고 모여 일어나는 기적처럼.

얼마 전에 김현 시인을 만났다. 그는 매해 새해 계획을 세우곤 하는데, 작년의 계획을 듣는 순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늦잠을 더 자주 자고, 야식을 종종 먹고, 줄넘기를 하다 중도에 포기하고, 마감 같은 거 일주일씩은 늦을 것, 짝꿍에게는 더 징징대고 인간관계는 더 복잡해질 것. 그러니까 마음을 다해 대충 살 것.” 그리고 그는 작년 계획의 상당수를 달성했다고 했다. 현장에서는 그냥 웃어넘겼지만 잠들기 전에 그 계획들이 자꾸 떠올랐다. 거창하지 않지만,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고 사람임을 자각하는 순간들은 다 저기에 있었다.

그는 작은 것들이 가져다주는 활력을 아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작은 계획을 달성했을 때 찾아오는 기쁨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줄넘기를 하는 것도 계획이지만, 그것을 하다 중도에 포기하는 것도 계획이다. 어떤 일을 진득하게 수행하는 것도 사람이지만, 싫증을 느끼거나 끈기가 부족해서 그 일을 그만두는 것도 사람이다. 그는 사람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며 사람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일상에서 해낼 수 있는 것들을 계획으로 삼는 일은 거창하지는 않아도 근사하다. 스스로를 긍정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김현 시인의 계획을 곱씹으며 나는 올해 나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병상에 있는 아빠와 자주 눈 마주치기, 엄마가 지치지 않게 옆에서 웃겨드리기, 친구들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기꺼이 축하하고 슬픈 일이 생기면 마음 다해 위로하기, 매일 나만의 한 시간을 만들기, 지역에 있는 독립서점에 찾아가기, 새로운 길로 산책하기, 틈틈이 메모하기, 작고 여리고 하늘하늘한 것들을 눈여겨보기, 그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 항목들을 적고 나자 피식 웃음이 났다. 어떤 계획은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안다. 그 시간들이 나를 생생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적어도 나는 안다.

책을 읽다가 밑줄이 그어진 부분을 발견했다. “너무나 명백히 있기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명백한 것들 앞에서 사람들은 의심하기를 멈춘다. 당연한 것은 자극이 되지 못하므로. 그러나 스스로가 명백해지는 순간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 순간이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내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이따금이라서 더욱 소중한 순간을, 항상이라서 지나치기 쉬운 순간을 심신에 열심히 새겨야겠다. 작은 것들이 내 삶의 물꼬를 터주는 상상을 해본다.

작고 여리고 하늘하늘한 것들을 통해 내년 이맘때쯤 나는 더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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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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