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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이굴기의 꽃산 꽃글

노루귀

경향 신문 2015. 2. 23. 21:00

자음과 모음으로 조합된 사전 속의 많은 낱말 중에서 ‘봄’이란 단어에 새삼 움찔해지는 요즈음이다. 우리 산하의 골짜기마다에도 이런저런 기운이 모이고 연결되어서 수많은 꽃들이 배열된다. 남녘에서부터 벌써 복수초, 변산바람꽃, 너도바람꽃 등 을미산(乙未産) 야생화들의 개화 소식이 훈훈한 바람결을 타고 북상한다. 입춘 지나고 이제 곧 경칩이 되면 달콤한 봄비에 등짝을 맞으며 개구리도 뛰어나오겠지만 그보다 먼저 땅을 헤치고 등장하는 건 노루귀이다.

잎이 올라올 때 노루의 귀처럼 동그랗게 말린다고 해서 그 이름을 얻은 노루귀. 잔털이 잎과 줄기에 빼곡하게 나부낀다. 노루를 직접 본 적 없으니 송아지의 그것처럼 간지럽고 정다웠다. 웬만한 산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야생화이지만 나에겐 작년 안양의 수리산에서 본 것이 으뜸이었다. 제대로 피진 못했지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 노루귀.

세상이라고 하는 큰 책의 갈피 같은 수리산 골짜기에서 변산바람꽃이 일제히 눈을 호렸다. 그 연약한 바람꽃의 꽃잎에도 마음이 글썽이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드물게 솟아난 노루귀를 발견하고는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졌다. 어느 죄 없는 짐승이 포수에게 맞고 흘린 듯 골짜기 사면에 흩어진 붉은 핏자국. 수리산 노루귀의 색깔이 유독 붉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겨울이 채 물러나지 않는 냉랭한 그늘 탓일까. 그해 처음 제대로 보는 꽃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꽃 관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올라갈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간판 하나를 보았다.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을 기념하는 그곳에 “이곳 수리산은 (…) 육군 51사단, 미 25사단과 터키 여단 1개 대대가 (…) 전투를 했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 국군 전사자 유해 4구, 사진 및 수첩 등 유품 621점을 발굴하여 뒤늦게나마 조국의 품인 국립현충원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라고 적혀 있거늘, 어찌 이 골짜기의 지하에서 올라온 노루귀의 유난스레 붉은 기운을 내 눈의 착각 탓만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노루귀 앞에서 엎드렸다가 일어날 때 노루귀라고 괜히 한번 더 부르고 싶어지는 노루귀.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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