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터가 필요하다. 경제적 뉘앙스를 풍기는 부동산이나, 행정용어 같은 거주지라는 단어와 달리 터는 인간의 근원을 건드리는 느낌을 준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능력을 지녔음을 증명해주는 문명의 출현도 인간이 한곳에 터를 닦고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터는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기반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터가 필요하다.

하나, 터가 없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터에서 밀려나고 또 어떤 사람은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기에 터를 떠나기도 한다. 터를 떠났는지 혹은 빼앗겼는지, 터를 떠난 이유가 경제적인지 혹은 정치적 상황인지에 따라 터가 없는 다양한 이름의 집단이 생겨난다. 어떤 이는 실향민, 어떤 이는 철거민, 그리고 어떤 이는 난민이 된다. 실향민도 철거민도 난민도 아닌데 일정한 터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통상 노숙자라 부른다. 길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노숙자보다 ‘집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홈리스(Homeless)나 독일어 옵다흐로저(Obdachloser)가 이들의 처지를 더 잘 표현해준다. 법률상으로만 봐도 그렇다.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노숙인 등’은 상당한 기간 동안 일정한 주거 없이 생활하는 사람, 노숙인시설을 이용하거나 상당한 기간 동안 노숙인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 상당한 기간 동안 주거로서의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법률상으로 우리가 흔히 노숙자라고 부르는 사람은 길에서 자는 사람만으로 한정되지 않고 취약하고 유동적인 주거상황에 놓인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잠정적으로 ‘노숙인’이라는 단어를 절제하고, 일단 그들이라고 칭해보자. 우리는 그들을 서울역, 용산역, 영등포역, 청량리역 주변에서 마주친다. 가끔 우리는 대낮에도 술판을 벌이고 있는 그들을 목격한다. 어떤 이는 큰소리를 지르고 있고,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도 있다. 그들과 자주 마주치지만, 서로 별개의 세계에 살고 있는 듯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그 흔한 눈빛의 교환도 이뤄지지 않는다. 그들이 시지각의 범주 안에 있을 때, 그들을 시각적 구경거리로 삼지 않는 게 최소한의 교양을 갖춘 사람의 예의라고 나는 생각했다. 눈길을 주지 않으려 하다보니, 나를 포함한 우리는 그들과 냄새로 상호작용한다. 냄새로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순간 이미 머릿속에선 판단이 내려진다. 많은 경우 원색적이고 단정적인 단어가 그들을 판단하기 위해 동원된다.

대상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판단의 대상에 대한 내막 파악은 필수이다. 잘 알지 못한 채 내려지는 판단은 판단이 아니라 선입견과 고정관념의 반복일 뿐이다.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릴 만큼 그들을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다가갈 용기는 없다. 무작정 그들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물을 수도 없다. 그들에게는 대답해야 할 의무가 없고, 우리에게는 그들에게 물어볼 권리가 없다. 그들에 대해 말해주는 책을 찾았다. 직접 대면하여 대상에 대한 앎을 얻을 수 없을 때, 책은 늘 유용한 도구이다. 이 글은 전적으로 책의 도움을 받아가며 썼다.

그들이 아닌 사람의 기준에서 그들은 동일한 하나의 집단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아닌 우리가 모두 동일하지 않듯이, 그들 역시 동일한 집단은 아니다. 우리가 각자 우선시하는 가치에 따라 다양한 집단으로 분화되는 것처럼 그들 역시 분화된 인간 집단이다.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우선시하는 가치와 이른바 쉼터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우선시하는 가치는 다르다. 길거리보다 쉼터는 시설이 좋다. 쉼터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상정보를 모두 노출해야 한다. 음주도 금지되고 입소기간 중 재활교육에 참여해야 할 의무도 부과된다. 이런 규제가 싫은 사람은 그래서 쉼터의 물리적 편안함보다는 날것 그대로의 ‘거리의 자율성’을 선택하기도 한다.

만약 그들이 대낮에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목격하면, 우리의 입에선 ‘게으름’이라는 단어가 즉각 발사된다. 게으름과 노력하지 않음은 그들은 사회적 연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라며 그들을 비난할 때 근거로 흔히 사용된다. 그들의 게으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에 잭 런던은 <밑바닥 사람들>에서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곳 영국에서 주당 20실링(5달러)을 벌기 위해 일하고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밤에는 잠자리에 드는 것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쉽다. 거리를 떠도는 사람은 더 힘들고 더 열심히 움직이지만 얻는 것은 훨씬 더 적다. 나는 이미 그들이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육체적인 피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쉬러’ 수용소에 가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게으름과 노력하지 않음이 건물주라는 우리에 속한 어떤 사람과 만나면 노숙이 아니라 부를 만들어내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의외로 잘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우리는 그들도 모른다. 잘 모를 때 섣부른 단정을 하지 않는 게 현명한 처사이며 인간의 도리이기도 하다.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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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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