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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임의진의 시골편지

눈구름

경향 신문 2022. 11. 24. 10:48



수염, 장발, 도복, 도사들로 혼탁한 세상. 트레이드 마크 턱수염을 깎고 긴 머리도 싹둑 잘라 버렸다. 너무 단정해서 목사님 같다고들(?) 그런다. 마음 같아선 스님처럼 삭발도 해보고파. 예전에 절밭을 지나가면 허수아비도 승복을 입고 서 있곤 그랬다. “풀 쪼던 호미 그대로 두고 스님 밥 지으러 간 사이 허수아비 혼자 콩밭을 지킵니다. 떡 벌어진 허수아비 스님을 닮진 않았지만 모자와 저고리만은 스님 걸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별이 된 초등교사 임길택 샘 시는 누구 말마따나 가을날 들꽃처럼 가난해서 참 좋아. 여기서 퀴즈. 허수아비 아들이 누구게? 허수지 누구야. 허수는 어딜 가고 아비 혼자 밭을 지키누. 허수의 고독과 설움, 책무의 무거움까지 마음 쓰인다. 

김장철이니 산밭도 텅텅 비어가. 고구마가 먼저 빠져나가고, 배추와 무가 빠져나가고, 대파도 날쑥 빠져나가고 있다. 깨밭 콩밭 다 털린 뒤, 허수아비가 지킬 게 별로 없어지면 비로소 가을걷이 끝. 

빈터에 첫눈은 언제 내릴랑가 몰라라. 첫눈 오면 아궁이에 불 때면서 고구마 구워 먹으며 듣고픈 노랫가락. “낙엽지면 설움이 더해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눈길을 걸으며 눈길을 걸으며 옛일을 잊으리라.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허걱 벌써 겨울인데 어째. 지난 한 주는 도쿄에서 어슬렁. 섬나라는 날이 따뜻하고 화창했다. 그곳 식구가 더 놀자며 떠나지 말라 말렸으나 하얀 겨울까지 언제 기둘려. 사요나라~ 귀국길. 하늘 어딘가 첫눈 실은 눈구름이 있을 텐데, 비행기 창문 너머로 찾아보았다. 

“요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친구가 물어. “첫눈은 언제 내릴까 생각하는 중이요” 싱거운 대답. 싱거우나 사실이 그래. 반가울 눈구름과 ‘인생 먹구름’을 구별하여, 마음을 쫑그린다. 첫눈에 보자는 약속은 없다만, 허수아비라도 나랑 놀아 주려나?

<임의진 목사·시인>

 

연재 | 임의진의 시골편지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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