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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경향시선

다음에

경향 신문 2019. 2. 25. 15:17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 박소란(1981~)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언젠가, 나중에 하자는 말을 자주 한다. 이번 차례가 아니라 뒤에 하자는 이 말은 실행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이 말이 꼭 빈말만은 아니어서 기대가 생긴다. 더욱이 사랑의 감정이 있는 사이에 오간다면 설렘이 있다. 설렘이 있어서 마음은 뒷날의 시간으로 먼저 가서 살게 된다. 비록 이미 해놓은 그 약속이 오늘 지켜지지 않고 다시 미뤄지더라도, 늘 다음이 또 오더라도, 저 백반집에 가서 한 끼의 밥을 먹는 일이 또 연기되더라도 마음은 후일의 때로 먼저 가서 살게 된다. ‘다음에’라는 말은 “공연히 기다리는 이의 마음이” 되게 하는 말이 아닐지. 사랑의 언덕 위를 불어가는 봄바람 같은 말쯤이 아닐지.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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