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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중인 방송 프로그램의 ‘막내작가’ ㄱ씨를 보면 흰 토끼가 떠오른다. 통통한 하얀 볼, 늘 미소를 머금은 입가에 도드라진 앞니 두 개. 그런데 그날은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찾을 수 없었다. 흡사 억울한 토끼 같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해들은 사연은 이렇다. ㄱ씨는 하나의 집이었던 것을 여러 원룸으로 쪼갠 다가구주택에서 월세로 살았다. 단열·방음 등에 문제 있음은 당연했고, 기타 수리 가능한 문제도 건물 주인이 제때 고쳐주지 않아 불편했다. 그렇다고 전문가를 불러 수리한 뒤 영수증과 함께 비용을 청구하는 방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계약기간 동안 버틸 따름이었고, 기한이 만료되자 쾌재를 부르며 모든 짐과 함께 탈출했다.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벽에 곰팡이가 생겼다는 게 이유였다. 환풍이 어려운 구조를 가진, 노후된 주택 자체 문제라고 ㄱ씨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도배 비용은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임대인은 정확한 비용은 청구하지 않은 채 보증금 1000만원을 돌려주지 않고 버텼다. ㄱ씨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부모에게 도움을 청했다. 집주인은 모친과 통화하며 그동안 ㄱ씨의 집에 누가 방문했는지 사생활을 노출하며 ㄱ씨를 깎아내렸고, 모친에게도 모욕적인 언사를 했다. 사생활 보호에 어찌나 둔감한지, 그는 일전에 잠긴 문을 열고 침입해 ㄱ씨의 비명을 자아낸 적도 있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여서 ㄱ씨는 더욱 놀랐다.

사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다. 나도 이제 1인 가구 6년차다. 6년 동안 더러운 꼴을 많이 봤다. 그럼에도 ㄱ씨의 얘기에 새삼 놀란 것은, ‘종합판’이어서다. 한두 가지 결점을 가진 집주인은 흔하지만, 한 사람이 이렇게나 다 갖추다니…. 이제 2020년인데, 이 정도로 낡아빠진 집주인이 멸종하지 않았다니….

ㄱ씨가 서투르긴 했다. 특히 보증금 받기 전 짐을 다 빼고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줬다는 얘기에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서툰 상대라도 이렇게까지 막 나가면 안되는 거잖아. 밟힐 것 같은 대상은 짓밟고 빨대 꽂아 부를 증식하는 삶의 방식, 혹시 나이 지긋한 집주인이 이제껏 살아온 방식이 아닐는지.

배경에는 이를 허용하는 사회가 있다. 자기 소유의 주택이어도 세입자가 사는 동안 권리가 제한되며, 동시에 지켜줘야 할 세입자의 권리가 있다는 기본 중의 기본을 무시하는 임대인에게 그렇게 살면 큰일 난다고 옆구리 세게 꼬집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제부턴가 ‘주택 문제’를 다루는 뉴스에 관심이 줄었다. 대부분이 서울의 아파트 매매 관련 뉴스였기 때문이다. 내겐 1000만원도 큰돈인데, 그것도 오랜 기간에야 간신히 모을 수 있는데, 몇 억원을 우습게 말하는 기사에 박탈감과 불안감이 자극됐다. 자극된 사람이 나뿐만 아니어서 지속적인 집값 상승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설움 안 당하려면 빚내서 집 사야 한다는 ‘심리’.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자산이 있어야 가능하다.

서울에서 아파트 사는 것, 어차피 이번 생엔 가망 없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니, 대한민국 전체 인구를 따지면 이쪽이 다수다. 그럼에도 많은 언론은 서울의 아파트를 가졌거나, 꿈이라도 꿀 수 있는 계급을 위한 뉴스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자분들이 감정이입하는 계급인가 보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아파트 매매가 등락을 매일매일 중계하듯, ‘해도 너무한’ 집주인이 발견될 때마다 한 명 한 명 대서특필한다면? 자신의 행위가 파급력 있는 매체에 보도될 가능성이 높음을 의식한다면, 해도 너무한 짓은 좀 덜 하지 않을까? 세입자가 통화 내용 등 증빙자료와 함께 제보하면 후속 취재를 통해 보도하는 상설 코너가 있는 프라임 타임 뉴스쇼를 그려본다. ㄱ씨와 같은 이들이 제보할 수 있게. 앞으로의 10년은 나아지기를.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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