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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제11회 서울국제작가축제가 막을 내렸다. 축제의 대주제는 ‘월담’이었는데, 주제를 접하자마자 떠오른 것은 “담을 넘다”라는 의미였다. 축제 참가 섭외 전화를 받았을 때 산책하던 나는 주위를 올려다보며 막연히 어떤 담을 넘어야 하나 생각했다. 넘기 위해서는 먼저 담을 마주해야 했다. 우선적으로 혐오와 차별, 부조리 등으로 켜켜이 쌓인 사회적인 담을 직면해야 했다. 아주 오래되고 굳건한 담, 혼자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담. 그 담 앞에서 고개가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개인적으로는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e)’과 나태함이라는 이름의 담을 넘어야 했다. 쓰는 습관이 익숙해질 때쯤 어김없이 찾아오는 담인데, ‘이만하면 됐다’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머릿속에서 기분 나쁜 종소리가 울리는 것이다. 그 소리에 맞춰 머릿속에 재빨리 담이 세워진다. 그럴 때면 ‘연상(聯想)’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시는,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담과 개인적인 담이 내게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계속 떠올리게 하는 셈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 너머”를 가리키는 월담(越談)에까지 가닿았다. 문제는 이야기 너머를 상상하기 위해 또다시 이야기를 소환해야 했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이야기, 그러나 아무도 선뜻 나서서 하지 않는 이야기, 어디에나 있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그래서 특별하지는 않은 이야기, 인류가 등장한 이후 중단된 적 없이 여기저기서 쌓여왔던 이야기… 이야기 너머에는 교훈이나 깨달음이 있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지금껏 써왔던 이야기와 앞으로 쓸 이야기도 어딘가 있을 것이다.

‘월담’에서 “달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다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 멀리 갔다고 생각하면 산책이 여행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나는 방금 ‘사이’에 있다가 온 것 같다고 느낀다. ‘월담’이라는 말을 비집고 들어가 단어와 단어 사이,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를 횡단했다. 누군가는 딴생각이나 잡념, 혹은 공상(空想)이라고 할 테지만, 내겐 걸으며 몸을 쓰고 연상하며 머리를 쓰는 시간이다. 둘 다 결과를 바로 알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산책 후 이전보다 건강해졌다고 느끼긴 힘들고 연상 후 바로 뭔가를 쓸 수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한국어에는 ‘사이좋다’라는 단어가 있다. ‘사이나쁘다’라는 단어는 따로 없다. ‘사이좋다’라는 단어는 둘 이상의 존재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데, 나는 그사이로 들어가보는 걸 좋아한다. 

‘하늘’과 자주 짝을 짓는 ‘높다’나 ‘푸르다’ 말고 다른 단어를 떠올리려 애쓴다. 발명이나 발견이라기보다는 ‘발생’에 더 가까운 노력이다. 자주 실패하고 간혹 성공한다. 말의 질서가 견고하니 말이다. ‘하늘이 낮을 때도 있지 않나? 푸르다는 말은 저 다양한 하늘빛을 포괄하지 못하지 않나?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내려가는 존재는 없을까?’ 언뜻 무용하게 보이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는 심신을 움직여 담을 넘고 사이로 파고든다.

흔히 담을 넘는 일에는 저기로 향하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다정함이다. 여기와 저기 사이에 기꺼이 몸담겠다는 마음 말이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록 <다정한 서술자>(민음사, 2022)를 읽고 반가웠던 이유다. 한 대목을 옮긴다. “다정함이란 대상을 의인화해서 바라보고, 감정을 공유하고, 끊임없이 나와 닮은 점을 찾아낼 줄 아는 기술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감정을 공유하기 위해 담을 넘고 나와 닮은 점을 찾아내기 위해 사이로 들어간다. 흔흔히 담을 넘고 사이로 파고드는 일, 그것이 내겐 글쓰기다. 어쩌면 사이좋기가 쉽지 않아서 ‘사이좋다’라는 단어가 생긴 것은 아닐까?

<오은 시인>

 

 

연재 | 문화와 삶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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