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 가면 전봇대에 자꾸 눈길이 간다. 너절한 세상 따위는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저 멀리 달아나는 전봇대. 껑충한 전봇대는 키만 큰 게 아니다. 수많은 소식과 사연을 전달하느라 귀가 아주 발달했다. 길에도 막다른 골목이 있는 것처럼 전봇대도 그 끝이 있을 것이다. 혹 말이 바뀌는 국경 근처에 가면 전봇대의 최후를 볼 수 있을까. 흔치 않은 외국 여행은 주로 비행기를 이용했으니 그 또한 여의치가 않아 아직까지 궁금한 사항으로 남았다. 육상선수처럼 성큼성큼 뛰어가는 전봇대, 너는 자꾸 어디로 가느냐.

사나운 파도를 가르며 대청도로 갈 때 문명의 척후병인 양 전봇대는 이미 나보다 먼저 상륙해 있었다. 혹 이곳에서라면 격리된 섬에서 진화를 관찰하듯 전봇대의 일생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작은 섬은 섬대로 한없이 넓고 깊어서 좀체 그 끝을 보여주지 아니했다. 허겁지겁 쫓아가는 텅 빈 공용버스를 보기좋게 따돌리며 숲으로 들어가더니 저 멀리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전봇대. 하늘을 배경으로 참으로 아름답게 구름의 난간을 밟고 올라가는 것을 목격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대청도와 백령도에서 자생하는 대청부채를 바닷가에서 만난 뒤, 이 지역에서 겨우 볼 수 있는 나무를 찾아나섰다. 섬마을을 잇는 줄기 같은 도로를 벗어나 확 좁아지는 가지 같은 임도로 접어드니 여느 곳과 다름없는 생태계가 눈을 호린다. 북한계선에 위치한 동백나무를 구경하고 돌아나오는 길켠에서 좀 특이하다 싶은 나무를 용케 꽃동무가 찾아냈다. 이름도 아주 특이한 뇌성목. 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는 게 특징인 감태나무와 아주 유사하다. 감태나무가 산지에 산다면 뇌성목은 바닷가에 산다.

어린 시절 학교 갔다 오다가 무청 돋아나는 밭에 꽂힌 전봇대 아래에서 들리던 윙윙윙 소리는 조금 무시무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우물로 던진 밧줄 같아서 그 끝을 잡고 대처로 가는 꿈을 의탁하기도 했었지. 뇌성목, 그 이름은 천둥치는 소리라는 뜻의 뇌성(雷聲)이라고 한다. 외딴 섬, 대청도에서 만난 전봇대 옆의 뇌성목, 녹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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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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