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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언어는 희망을 약속하고, 종교의 언어는 구원을 계시한다. 정치는 시간을 단절시키면서 ‘새것’ ‘새 희망’을 말한다. ‘좋은 옛것’과 ‘나쁜 새것’은 두 갈래의 정치적 선택이기도 하다.

1948년 7월24일의 일이다.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취임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대한민국도 극적으로 건국이 이뤄졌다.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국민을 “새로운 백성”으로 호명했다. ‘백성’은 일반 국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계급사회에서 사대부가 평민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오늘날 백성은 낯선 위계의 언어다. 역대 대통령의 취임사에 등장하는 ‘나’와 ‘본인’도 마찬가지다. 권위주의 정부는 대통령과 국가를 동일시했고, 통치권자로서의 절대권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곧 짐(朕)이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언제부터 ‘나’와 ‘본인’이 사라졌을까? 1988년 2월25일, 노태우 전 대통령 때부터 ‘저’가 등장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뽑힌 대통령이기에, 국민을 대하는 태도를 스스로 바꿨다.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그리고 6월항쟁을 통해 쟁취한 민주주의의 힘은 대통령이 스스로를 낮추는 ‘언어의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힘이 깃들어 있는 ‘좋은 법과 제도’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법과 제도’가 인간의 존귀함과 생명의 존엄성을 다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좋은 법과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역량이 커질 수 있다는 희망을 키워 나갈 수 있을 뿐이다.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했다. 윤 대통령도 “저는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겠다고 취임사의 첫머리에서 밝혔다. 눈에 띄는 언어가 자유의 ‘재건’이고 ‘재발견’이다. 이전 대통령들이 ‘새로운 대한민국’ ‘새로운 길’을 이야기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표현이다.

윤 대통령의 취임사는 독특한 부분이 많다. 역대 대통령 취임사 중 최초로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을 호명했다. 이전까지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문재인·노무현·김대중)이나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700만 해외동포 여러분!”(박근혜·이명박) 등이 취임사의 첫머리를 차지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세계 각국 경축 사절을 일일이 호명했고, 세계 정세의 변화에 대한 언급도 국내 정세보다 앞머리에 두었다. 국제사회에서의 책임과 역할을 언급한 부분에서 향후 5년간, 윤석열 정부의 정책방향 기조를 확인할 수 있다. 세계질서에서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의 ‘글로벌 리더 국가의 자세’를 갖고 역할을 하겠다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담고 있다. 앞으로 한·중관계, 남북관계가 새로운 냉각 국면으로 변화할 것으로 예측된다.

윤 대통령의 취임사에 ‘세계 시민’이 새롭게 등장했다면, 이전에는 등장했다가 사라진 언어도 있을까? ‘민족’은 박근혜 전 대통령 때까지 모든 대통령 취임사에 중요하게 등장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때부터 ‘민족’이라는 단어는 사라져,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에도 쓰이지 않았다. 이는 지구화 시대에 ‘민족은 폐쇄적인 언어’라는 인식 때문이다. 윤 대통령 취임사에서 등장하지 않아 우려스러웠던 언어는 ‘평등’과 ‘차별’이었다. 이는 ‘자유’가 35회나 등장했기에, 더 부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역대 취임사에는 ‘기회의 평등’(문재인), ‘양성평등’(이명박·노무현), ‘자유, 평등, 행복이 가득한 나라’(노태우) 등이 나온다. 차별에 관한 언급도 중요했다. ‘차별 없는 세상’(문재인), ‘불합리한 차별 철폐’(노무현), ‘남녀차별의 벽 제거’(김대중), ‘출신 지역이나 성별이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불이익을 받지 않아야 한다’(노태우)고 했다. 대부분의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이야기했던, ‘소수자·약자·소외받는 사람을 보살피겠다’는 약속도 윤 대통령의 취임사에서는 사라졌다.

자유만을 강조하면 평등의 가치가 지워진다. 자유가 재건해야 할 낡은 것도 아니고, 평등이 사라져야 할 새것도 아니다. 평등과 차별 금지는 사회 약자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한 민중 삶의 중요한 방어선이다. 지나친 양극화와 사회갈등도 평등한 권리의 옹호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민중의 삶에 대한 돌봄이 우선인 ‘평등과 차별 금지’가 정치언어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 대통령의 언어는 민중 삶의 변화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친다.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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