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저녁, 또 하나의 마침표가 찍혔다는 소식을 듣고 멍해졌다. 끝나서는 안될 문장이 갑자기 중단되듯이 예고 없이 찍혀버린 마침표. 그 마침표는 하나의 사실을 가리켰다. 자살. 이 두 글자는 비교적 명확하게 죽음의 원인을 설명한다. 살인 용의자도, 수사기관의 수사도, 재판부의 판결도 필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갑작스레 찍혀버린 마침표 앞에는 무수히 많은 문장들이 있음을. 한 사람의 삶이, 이를 꺾어버리고 상하게 한 폭력과 사회적 압박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문장을 이어가고자 했던 손을 억지로 잡아채 비틀어버린 힘들이 있었다는 것을. 

25일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가수 구하라씨의 조문장소에 팬들이 들어가고 있다. 구씨의 빈소는 서울 강남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지만, 팬들을 위해 따로 이곳에 조문장소가 차려졌다. 김정근 선임기자

마침표 이전에 쓰인 수많은 문장들을 기억한다. 적어도 최근 쓰인 문장들은, 고인의 손으로 쓰이지 않았다. 불법촬영·폭행·협박 등으로 이어진 문장들은 집행유예로 끝을 맺었다. 여론은 피해자에게 가혹했지만, 법원은 가해자에게 관대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0단독 오덕식 부장판사는 가해자 최종범에게 상해·협박 등은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불법촬영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했다. 최종범은 미용실을 새로 열고, 축하 파티를 열었다. 만신창이가 된 쪽은 피해자인 고인이었다. 고인에 의해 쓰이지 않은 왜곡되고 비틀린 말들이 문장을 이어가는 손을 꺾어 마침표를 찍게 했을 것이다. 

비보가 ‘속보’라는 이름을 달고 퍼지기 이틀 전, 또 하나의 속보가 전해졌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무죄 소식이었다. 의혹 제기 후 6년 만에 법정에 선 김학의의 재판 결과 성접대는 공소시효가 지나서, 뇌물 등은 증거가 없어서 무죄였다. 김학의 사건 재수사는 버닝썬으로 남성 연예인의 성폭력, 권력과의 유착 의혹이 불거지자 ‘썬학장’(버닝썬+김학의+장자연)으로 불리면서 촉구됐다. 검찰과거사위원회는 ‘장자연 사건’은 재수사조차 하지 않았고, 김학의 사건은 재수사에 부쳤다. 하지만 남은 것은 ‘무죄’다. 

무죄, 증거없음, 집행유예. 이 가벼운 말들은 피해자에게 당신이 입은 피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당신의 고통은 별거 아니라고,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와 폭력은 대수롭지 않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 동영상’을 검색·공유하며 피해자가 입은 폭력을 재생산하고 조롱했다. 세상에 발붙일 곳 없다고 느낀 이들은 세상을 떠난다. 이 죽음에 수사기관은, 사법부는, 당신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가. 

때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25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폭력추방의날’이다. 세계 각국에서 여성 살해·폭력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프랑스에서는 올해 남편이나 연인, 헤어진 연인 등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이 최소 116명에 이른다고 한다. 독일 베를린에선 올해 119명의 여성이 살해당했다며 ‘페미사이드’ 반대 집회를 열었다. 거리엔 “더 이상 누구도 죽어선 안된다”는 구호가 울려퍼졌다. 한국은?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 보도 사건을 분석한 결과 2017년 남편이나 애인 등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85명이었으며, 살인미수까지 합하면 188건에 달했다.

여성들은 살해당하고, 맞고, 몸을 촬영당하고, 험담과 수군거림, 손가락질을 받고 고통에 내몰린다. 가해자에게 수사기관과 법원은 불기소하고, 무죄를 선고하고, 집행유예로 풀어준다. 이런 사회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피해자가 생긴다면, 이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남성에 의한 여성혐오적 여성살해’를 뜻하는 페미사이드는 현재진행형이다. 

아름답고 재능 있던 한 사람이 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난 곳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곳이다. 이곳을 변화시키는 것은 남은 자들의 몫이다. 갑작스레 마침표를 찍고 끝나버린 문장을 우리가 제대로 완성해야 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라. 당신이 사는 삶을 사랑해라.” 고인이 생전에 남긴 말이다. 이제 고통 없는 곳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인 채로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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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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