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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자는 언제부터 있었나. 그건 내가 언제 이 세상에 왔을까와 똑같은 물음이다. 따라서 내가 이 세계로 미끄러져 나올 때 그림자도 함께 태어났다고 해야 정확하다. 울음보다도 먼저 그림자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자란, 태양이 너희들은 모두 언젠가 녹여먹을 사탕이야, 라고 지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찍어놓은 불도장 같은 것! 참 시시한 질문 같았는데 말하고 보니 감히 <논어>의 한 대목, 절문근사(切問近思)를 들먹일 수도 있겠다는 궁리와 함께 발밑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그림자를 관찰해 본다. 본다고 다 보는 게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그림자. 그 그림자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고등학교 지구과학 시간에 들었던 한마디로 귀결된다. 직진하는 햇빛은 너무나 멀리에서 오기에 지구에 평행하게 도착하고, 그래서 그림자가 생긴다! 이상하게 그 말이 참 마음에 오래 남아 그 이후 그림자에 대한 관심을 간단없이 이어지게 하는 한 이유가 되었다.
낯선 고장에 저물 무렵에 도착하는 건 사소한 축복이다. 뉘엿뉘엿 석양에 반사되는 밀양(密陽) 이정표를 보면서 네이버 옥편을 뒤적였다. 빽빽한 햇빛 혹은 비밀의 햇빛, 밀양. 낮에는 지푸라기처럼 빽빽했다가 밤이면 비밀스럽게 변하는 햇빛인가. 그래서 비밀은 햇빛 속에 다 드러난다는 것인가.
밤이란 지구의 짙은 그림자. 그 그림자에 폭 파묻혀 밀양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유명한 얼음골을 지나 천황산 오르는 길. 볼 게 많았다. 여름임에도 너덜겅의 돌 밑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다. 허준이 스승 유의태를 해부했다는 동의굴의 서늘한 바위에는 짙은 분홍의 설앵초. 얼음골과 그 이름이 잘 어울리는 꽃이다. 꽃도 꽃이지만 오늘은 그림자에 특히 유념하기로 했다.
산에서 나무 한 그루의 사연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심오하다. 쟁반 같은 나뭇잎에 담긴 꽃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별 모양의 흰 꽃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덜꿩나무. 잎은 물론 가지, 줄기에 털이 밀생하는 덜꿩나무. 모양이 반듯해야 그림자도 반듯하다. 이 세계를 두껍고 깊게 복사하는 꽃과 그림자를 찰칵, 찍었다. 덜꿩나무, 산분꽃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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