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데 옆 테이블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다 못 먹겠으면 좀 덜어.” 상냥하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어른 하나와 소년 둘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말에 한 소년은 부리나케 밥을 덜었다. 밥을 던 소년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밥을 덜고 나니 마음의 짐도 덜어진 모양이었다. 다른 소년은 밥을 덜지 않았다. 묵묵하게 숟가락으로 밥을 뜨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었다. “다 먹었다!” 밥을 던 소년이 신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밥을 덜지 않은 소년의 손놀림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내 밥그릇을 보니 아직도 절반 넘게 밥이 남아 있었다. 분명 주문할 때는 허기졌는데, 막상 음식이 나오니 배고프지 않았다. 오늘 첫 끼니야, 더위에 지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먹어야 해, 김치가 맛있게 잘 익었네…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며 꾸역꾸역 먹었다. 옆 테이블의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억지로 밥을 먹은 게 결국 탈이 났다. 오후의 일정을 소화하다가 여러 번 배를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렸다. 음식물을 소화하지 못하면 주어진 일을 소화하기 힘들다.

다음 날 친구와 함께 간 식당에서는 고봉밥이 나왔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른 밥을 덜어 친구에게 주었다. 먹성이 좋은 친구는 고맙다고, 이것밖에 안 먹어서 괜찮겠느냐고 잇따라 말했다. 요새 소화가 잘되지 않는다고 말하자 초록색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 했다. 고깃점을 든 채 그 말을 하니 이상했지만, 기분 좋게 웃었다. 더하는 게 필요할 때가 있고 더는 게 필요할 때가 있음을 알았다. 친구는 배가 고프고 식욕이 왕성하다. 내가 던 무언가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덤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바깥에 나오니 길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인권이 부른 ‘돌고, 돌고, 돌고’였다. “우는 사람 웃는 사람/ 서로 다르게 같은 시간 속에/ 다시 돌고 돌고 돌고”라는 가사를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돌고 돌고 돌고”가 흡사 “덜고 덜고 덜고”로 들렸기 때문이다. 웃는 사람이 자신의 것을 덜어주면, 동시에 우는 사람이 자신의 고민을 덜어내면 사이좋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시간 속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좋을 것이다.

몸의 짐을 덜면 어깨가 가뿐해진다. 밥을 함께 먹은 친구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떠날 때 배낭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더 오래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더 많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로소 여행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짐을 더는 만큼 시간이 더해진다고 생각하니 근사했다. 몸의 짐은 마음에도 영향을 끼친다.

마음의 짐을 덜면 걸음이 경쾌해진다. 눈앞에 처리해야 할 일이 없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코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할 필요가 없으니 느긋하게 기지개를 켤 수 있다. 원치 않은 일에 개입하게 되었을 때,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벅찬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하고는 싶지만 잘할 수는 없는 일을 맡게 되었을 때,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그 마음으로 착수하는 일에 몸이 기민하게 반응할 리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덜어야 한다. 그래야 일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빽빽해서 빛살 한 점 들이치지 못했던 일상이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더는 일은 비우는 일이기도 하다. 나를 옥죄고 위협하고 지우려 하는 것들을 덜어내야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비어 있는 상태여야 채울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한테 절박한 것이, 꼭 필요한 것이.

먹은 것이 채 소화되지 않은 상태거나 특정 식재료를 소화할 수 없는 몸에는 값비싼 음식물조차 독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맡은 일을 소화하지 못했는데 새로운 일에 뛰어드는 것도 심신에 과부하를 일으킨다. 어떤 감정이 소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를 쾌히 만나고 무언가를 척척 만드는 일도 어렵다. 그때 필요한 것이 다름 아닌 더는 일이다. 더는 버틸 수 없을 때에는 능동적으로 덜기 시작해야 한다. 일을, 계획을, 주변 사람들을.  

더는 일은 나를 응시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면서, 때로 도움을 주기까지 하면서 스스로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셈이다. 담을 때가 아니라 덜 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보인다. 기꺼이 더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오은 | 시인>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품격에 대하여  (0) 2019.08.13
글과 닮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0) 2019.08.08
덜어내는 삶  (0) 2019.08.06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0) 2019.08.01
소년의 마음으로 쓰는 소년의 글  (0) 2019.07.30
민어  (0) 2019.07.2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