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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돌봄의 윤리와 노동

경향 신문 2021. 9. 24. 09:17

“교수님, 시댁에 갈 일이 있어서 오늘 수업 못 갑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학원 수업에 못 온다고 제자가 문자를 보내온다. 달력을 보니, 아하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벌써 추석인가요?” 바로 답이 온다. “네. 사실 추석 차례를 준비해야 해서요. ㅠㅠ” 이모티콘까지 보내 속상한 마음을 전한다. 수없이 되풀이해서 확인하는 경험적 진리. 공부하는 여성이 이룰 학문 성취에 대한 기대가 극도로 낮은 사회.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나 보다. “다음부턴 공부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세요.” 바로 답이 온다. “시댁에 먹힐지 모르겠어요. ㅋ”

일상에서 체감하는 현실을 반영하듯, 여성에게 떠맡겨진 가족 돌봄이 명절에는 더욱 심해진다는 기사가 또다시 넘쳐난다. 백신 맞았으니 요번 추석에는 오라는 말에 “내가 이러려고 일찍 백신을 맞았나?” 자괴감에 빠진 며느리. 별수 없이 시댁을 방문해 돌봄 노동만 실컷 했다. 하지만 명절에도 남을 돌보느라 자기 몸 하나 돌보기 어려운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이 많다는 기사는 적다.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영·유아, 초등학생, 노인, 장애인을 돌보고 있는 여성의 삶이 평소에도 눈에 띄지 않았으니 새삼 놀랍지도 않다.

여성이 자신보다 남을 먼저 돌보아야 한다는 기대가 하늘을 찌른다. 왜 그럴까? 문화사회학의 시각에서 볼 때 ‘돌보아주는 엄마’와 ‘돌봄을 받는 아들’의 일방적 관계가 젠더 문화를 장악한 탓이다. 돌봄 전담자로서 엄마는 돌봄이 필요한 가족의 행복을 우선하도록 강요당한다. 가족을 먼저 돌보다가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되면 그 폐해는 엄마에게 이중으로 덮쳐온다. 우선 자신을 죽이고 남을 먼저 돌보다 보면 자아가 황폐해진다. 그러면 가족 구성원도 그런 황폐해진 자아를 무시하고 착취한다. 한 핏줄 같은 국민이라는데, 여성에게 ‘대한민국’은 돌봄 노동을 강제하는 하나의 커다란 ‘시댁’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아이일 때 타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았다. ‘엄마’(mOther)로 대표되는 ‘타자’(Other)의 헌신적인 돌봄이 없었다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돌봄은 인간존재의 보편 윤리다. 돌봄 윤리는 고립된 개인 대신 상호의존하는 개인에서 시작한다. 인간이 취약한 존재라는 겸허한 성찰이 서로 돌보게 한다. 고령화 사회, 누구든 타자의 전적인 돌봄이 필요한 노인이 된다는 사실 앞에 더욱 고개를 숙인다. 그런데 딸과 아들의 행로가 사뭇 다르다. 커갈수록 남을 돌보는 어른으로 크는 딸과 달리, 아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고 지위가 올라도 막무가내로 돌봄을 받기만 하는 어린 아들 행세를 한다.

문제는 이 행세가 개인 차원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 전체에 제도화되어 있다는 사실. 집 안팎을 가리지 않고 돌봄이 윤리에서 노동으로 전락했고, 이 저열한 돌봄 노동을 여성이 도맡아 하고 있다. 한때 살아가는 궁극적인 이유를 제공했던 효의 몰락한 처지가 이를 잘 보여준다. 현조(顯祖)의 삶을 재현하려는 가치를 상실한 효는 이제 여성이 전담하는 저열한 돌봄 노동으로 추락했다. 평생 남을 돌보다 허리가 휘고 무릎이 나간 엄마가 치매에 걸린 시부모를 돌본다. 가족 잔혹극의 참혹함을 덮고자 정치권이 앞다투어 사회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돌봄 노동을 제도화한다. 하지만 여성의 돌봄을 저열하고 부차적인 노동으로 치부하는 성차별 기제가 지배한다. 요양보호사, 장애아돌봄지원사, 아이돌보미, 보육교사, 노인돌봄종사자, 가사·간병서비스 종사자 등 수십만 노동자 중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나같이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 비정규직인데, ‘필수 노동자’라며 칭송한다. 돌봄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법 제도를 만드는 일은 물론 필요하다. 그렇지만 ‘돌보아주는 엄마’ 대 ‘돌봄을 받는 아들’이라는 일방적 젠더 틀을 하루빨리 부수어야 돌봄을 저열한 노동에서 구출할 길이 보인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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