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민국’이라 불릴 정도다. 마블의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역대 최단 1000만 관객을 모으는 신기록을 세웠다. 왜 이 정도로 난리일까? 돈 많이 들인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다는 충족감을 주는 ‘눈뽕’ 가득 시각효과, 호쾌한 액션, 등장인물들의 매력이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물론 마블 콘텐츠를 안 보면 대화에 낄 수 없어서 억지로 본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실제로 마블 스튜디오는 얘깃거리 많은 콘텐츠를 생산해왔다. 원형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시대와 연계해 풍부히 해석할 여지를 던졌고, (비록 아쉬운 점이 있을지라도) 다양성과 개방성을 강조하며 편견 타파에 초점 맞춘 메시지를 전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이 인기 있는 사회라고, 그 사회가 작품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곳은 되지 않는다. 포용적 가치관을 내세우는 문화콘텐츠가 범국민적 흥행을 하는 한국은 포용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이 간극이 나는 흥미롭다.

한국 국민 10명 중 8명은 난민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었고, 젊은 남성 집단은 난민뿐 아니라 여성에 대해서도 차별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통계 지표가 나타났다. 젊은 남성들은 마블 인기를 견인하는 핵심 지지층이다. 차별, 혐오, 폐쇄는 근래의 마블 영화 <블랙팬서> <캡틴마블>에서 지향한 가치와 정반대인데, 주요 마블 소비자들이 마블의 가치와 상이한 가치관을 가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런 것을 보면 ‘이야기는 힘이 세다’는 말도 옛말인가 싶다. 많은 사람들이 포용적인 가치관이 담긴 이야기를 접했지만, 그 가치에 감응하지는 않아 보이니 말이다. 

어쩌면 현대사회에 쉽고 저렴하게 접할 수 있는 양질의 콘텐츠가 너무 많기에, 작품 한두 개가 끼치는 힘은 미미할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여운에 빠져있기보다, 허기를 채우듯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삼키게끔 하는 환경이다. 사람들은 ‘이야기 폭식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새로운 콘텐츠를 찾아 소비하기를 반복한다. 이야기를 주워 삼키는 동안에는 현실의 고단함도, 외로움도 잊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야기가 사람을 삼키기도 한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일. 신화, 역사, 종교 등 거대한 이야기는 그게 가능하다. (안타깝게도) 태극기부대 어르신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산업화와 반공주의라는 지나간 이야기에 삼켜져, 원혼처럼 현재를 배회하며 울부짖는 사람들.

최근 ‘20대 남성’이라고 호명 받은 집단도 이야기에 삼켜진 이들로 보인다. 말은 바로 해야지, 이들은 사실 모든 20대 남성들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이 용어를 사용한 맥락에 따르면 이들은 ‘역차별 시대에 태어나 박해 받는 남자’라는 이야기에 심취해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청년들이다. “페미는 정신병”이라고 웅얼대고, 불법촬영 피해 여성에게 “함부로 다리 벌리고 다녀 그런 것 아니냐”며 2차 가해하고, “사실 여자들이 일 더 못하는 건 ‘팩트’ 아니냐?”며 임금차별을 정당화하는 그들의 레퍼토리는 발전이 없다.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본 말을 그대로 따라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논리력도 없나 보다. 그들 발언 자체가 여성혐오가 존재함을 입증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집단에 삼켜진 이들은, 본인이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강하다보니까 다른 사람도 그럴 거라 착각한다. 누군가 경험이나 의견을 나누고자 하면, 일단 방어부터 하고 본다.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내 주변은 안 그런데?”라며 속 터지게 하는 것이다. 내 편 아니면 적, 이분법으로 나눈 세계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은 실재하는 피해의 경험들과 문화적 폐단과 제도적 모순을 가린다. 

나는 개인과 개인 간의 다채로운 관계 맺기가 용이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사회 말이다. 마블도 좋지만, 가까운 사람들과 내 자신을 그보다 더 오래 봐야겠다. 멀리서부터 큰소리로 외치는 아우성들로 세상이 가득하지만, 가까이서 작게 소곤대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공감을 표하는 데 소홀하지 말아야겠다. 그보다 앞서야 하는 건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기, 스스로의 약점과 두려움을 마주하기, 나의 약함을 숨기려고 타인에게 상처 입히지 않기….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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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