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Run CCC - 렛츠런 문화공감센터’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렛츠런 문화공감센터에서 회원을 모집한다는 현수막도 함께 걸려 있다. 하모니카, 천연화장품, 중국어, 한국화, 노래교실, 캘리그라피, 요가, 우쿨렐레, 한국무용, 플로리스트 등 강좌 분야도 다양하다. ‘대체 뭐하는 곳인가’ 싶어 찾아봤더니 마권 장외발매소, 그러니까 실내 경마장이었다. 이 CCC는 ‘Culture·Convenience·Center’의 약자로 지역 주민과의 문화적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를 나타낸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름만 듣고는 뭐하는 곳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일단 ‘문화공감센터’라고 그럴듯하게 쓰여 있으니 설마 그곳이 실내 경마장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복합, 문화, 공감과 같은 좋은 의미의 단어들만 쏙쏙 가져다 붙여놨는지 문화예술계에서 일하는 내가 다 민망해질 지경이다. 돈을 걸고 베팅하는 ‘경마’가 주기능인 곳의 명칭이 ‘문화공감센터’인 것도 어처구니없는데 도대체 무엇에 ‘공감’하라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실제 경마는 엄연한 사행산업이며, 최근 10년간 사행산업 매출 166조원 가운데 경마가 42%로 최대라는 조사결과가 나와 있다. 그만큼 경마가 접근하기 쉬운 사행산업이라는 뜻이다. ‘사행산업 이용실태 조사’에 따르면 그중에서도 장외발매소의 도박중독 유병률이 가장 높았다. 이렇게 위험한 시설을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해놓고도 한국마사회는 장외발매소를 지역 주민의 문화 체험과 소통의 장소로 활용하도록 한 결과 온가족 문화놀이터로 변신했다는 장밋빛 평가만 내놓고 있으니 언어도단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라 해야 할까.


렛츠런문화공감센터 강북커뮤니티센터_경향DB


2013년에 출간된 <언어의 배반>(김준형·윤상헌, 뜨인돌)에 따르면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들 중에 본래 의미를 왜곡하고, 편견을 조장하는 것들을 ‘언어의 배반’이라고 부르며 이는 언어가 우리를 배반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언어를 배반한 것”을 뜻한다. ‘공정’이나 ‘진정성’ 같은 단어들이 한국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이런 가치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이런 가치들이 극도로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진단이다.

언어의 배반은 ‘문화공감센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새로 생긴 프랜차이즈 가게인데 간판에 ‘Since 1970’과 같은 고풍스러운 창립 연도가 버젓이 표기되어 있는 경우는 어떤가. 처음에는 진짜인가 고민해봤지만 이제는 인테리어의 구성 요소쯤으로 여기고 ‘그러려니’ 넘어가게 되었으니 이것도 적응이라고 해야 할까. 음식특화거리의 모든 가게가 ‘원조’를 간판에 커다랗게 써 붙여놓고 서로 ‘진짜 원조’를 강조하는 것도 모자라, 언제 생긴 가게인지조차 믿을 수 없게 된 셈이다. 시민의 눈을 피로하게 한다며 지자체가 간판의 크기와 개수를 규제하고 간판 정리사업까지 지원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새해를 맞아 벌어진 ‘병신년’ 논란은 또 어떤가. 사실 육십갑자에 따라 돌아오기 마련인 병신년(丙申年)을 ‘병신년’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비속어를 연상하게 하는 어감 탓에 발음을 활용한 패러디물이 넘쳐나고 있다. 민주노총은 약자에 대한 비하 우려가 있는 말을 쓰지 않겠다고 천명했고, SNS에서는 ‘병신년-소재-농담-NO-캠페인’ 해시태그를 달아 장애인과 여성을 비하하는 농담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캠페인이 진행 중이다.

한국 사회에서 언어의 오염, 언어의 배반을 해결하는 것은 꽤 중요한 숙제다. ‘병신년’을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단어의 의미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 언어가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는 2016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참에 ‘친박’이니 ‘진박’이니 말도 안되는 조악한 언어들로 심란하게 만드는 일도 그만들 좀 하시길.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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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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