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반 같은 출판계 몇 분과 무등산 가는 길. 아침에 광주행 KTX를 타면 당일치기로 너끈히 다녀올 수 있다. 행신은 幸信이다.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듯 행운의 우편엽서에 올라탄 기분으로 출발했다. 좌석의 등받이마다 정다운 문구가 있다. ‘마음을 잇다, 당신의 코레일.’ 행신역과 송정역을 잇는 기차에서 저 구절을 발견하니 자연스레 며칠 전 귓전을 울린 YTN의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관련 뉴스가 떠올랐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전야제부터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어도 그칠 줄을 모르고 거세게 망월동의 대지를 적십니다. (…) 기념식 시간이 되자 거짓말처럼 비는 잦아들었습니다. 하지만 빗물 대신 이제는 눈물이 행사장을 적셨습니다.” 비는 하늘에서 오는 물질이다. 비는 곧 물이다.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물은 낮은 곳을 찾아간다. 낮은 곳은 서러운 곳. 그렇게 물은 하늘과 유족의 가슴을 이어주고 있었다.

증심사~장불재를 잇는 길은 넉넉했다. 현직 대통령의 신분으로 직접 걸었던 인연으로 ‘노무현등산로’로 명명된 곳이기도 하다. 나무들의 그림자가 바닥에 일렁거렸다. 얼마나 화려한 흑백인가. 그 어떤 총천연색의 풍경보다도 더 가슴을 찌르는 서늘함이 있다. 최근 꽃산행을 다니면서 전에 없던 버릇이 하나 생겼다. 산에 가면 바위나 돌에서 사람의 얼굴이 자꾸 그려지는 것이다. 요즘은 아예 작정을 하고 바위 얼굴을 수집하기도 한다. 오늘, 오월의 광주, 무등산, 노무현등산로를 걷자니 감회가 아니 날 수가 없었다. 무정한 돌, 무심한 얼굴. 흙으로 녹아들어가는, 어디에서 사진으로 본 듯한, 억울하게 사라진 분들의 장엄한 표정 같은 바위 속, 돌 속 얼굴들. 바람이 깎고 비가 다듬고 발길로 조각한 바위 얼굴들!

그 돌들 옆의 덤불에 광대수염이 빤히 길 안을 바라보고 있다. 경상과 전라 등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꽃이지만 오늘 무등산에서 보는 꽃은 조금 색다른 느낌이다. 어둡고 그늘진 곳에서 꼿꼿하게 발딱 서 있는 꽃. 무언가 할 말이 많아서 고함을 지르는 꽃. 층을 지고 어깨 겯듯 모여서 피어난 하얀 꽃, 광대수염.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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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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