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학에서는 주권국가를 유·무형의 인적 및 물적 자원의 국경 이동에 대한 통제권과 자국 영토 내에서 최종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총체로 개념화한다. 그러나 국가의 ‘자율성’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다. 주권국가들이 공식적으로 서로에 대해 독립적이긴 해도 전략적, 군사적, 경제적 의존이나 종속 등 여러 이유로 상대국가의 주권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국제정치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위계적 관계에서 하부국가가 보여주는 순응적 외교정책 행태는 외부로부터의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했거나, 자율성을 확보했더라도 현저히 작다는 것을 나타낸다. 오래전 한국이 그랬다. 

박정희가 주도한 1961년 군사쿠데타가 미국과 한국 사이에 ‘제도화된 후견-피후견 관계’를 낳았음은 우리 현대사의 불편한 진실이다. 1964년 9월 사실상 1차 파병이 시작된 베트남전 참가(이후 1966년 4월까지 모두 4차례 파병이 이루어짐)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후견-피후견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한·일 국교정상화는 당시 악화일로에 있던 인도차이나 정세 요인 이외에 베트남 참전에 따른 한국의 군사적 공백을 이용한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미국의 책략과 미국으로부터 대외원조가 절실했던 박정희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이후 한국은 냉전기에 형성된 한·미·일 삼국구조에서 달갑지 않은 ‘주니어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미관계가 이처럼 위계적이긴 해도 아직도 과거의 후견-피후견 관계라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더군다나 한·미관계를 조공 내지 사대관계 운운하는 것은 자기비하적이다. 미국의 지배적인 관계가 더는 한국을 압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이를 부정한다. 탄핵위기를 넘긴 트럼프는 이미 여러 차례 한국을 부자국가로 규정하고서 방위비 분담금을 훨씬 많이 부담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의 심복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몇 주 전 월스트리트저널에 공동기고 형식으로 “한국은 동맹이지 미국에 의존하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절반만 옳다. 

진보 성향의 문재인 정부가 미국 주도의 질서에서 탈피하고자 외교적 노력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례로, 문재인 대통령은 2년 전 재외공관장 만찬에서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세계와 함께 걸어가되 우리가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우리는 우리 외교가 자주적인 독립정신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문 대통령에게서 ‘동맹의 방기(放棄)’에 대한 우려를 찾기란 어렵다. 

그렇다고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펼치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곧장 반미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의 우려 섞인 전망은 기우에 가깝다고 본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반미의 길로 돌아설 수 없도록 서울과 워싱턴을 잇는 연결망들이 복합적으로 촘촘하게 짜여 있으며, 무엇보다 70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혈맹’관계를 무 자르듯이 단절하는 게 생각만큼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상호 안보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동맹이 적절히 유지·관리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현재의 ‘울퉁불퉁한(bumpy)’ 동맹은 의외로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은 20세기에 손님으로 이 땅에 왔다. 그 손님이 만든 지배-의존적 동맹의 관계가 종종 주인인 한국의 외부적 자율성을 훼손하기도 했다.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 미확보로 인한 한·미의 특수한 주권적 관계에 유달리 불편을 느끼는 21세기 진보세력은 어느 때보다 강도 높게 ‘동맹의 정상화’를 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북한 개별관광 개시 시점과 난항에 빠진 한·미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 협상 결과가 진보정부의 대외적 자율성의 크기를 측정하는 가늠자가 될 것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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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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