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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다시 달리기

경향 신문 2021. 6. 10. 10:21

나는 달리기를 못한다. 누가 ‘얼마나 못하냐’고 물으면 꼭 말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마지막 가을 운동회였다. 학생 모두가 빠짐없이 참여해야 하는 200m 단거리 경주가 있었는데 가을 운동회가 예고된 순간부터 나는 그 경주에서 빠지기 위해 모든 수를 궁리했다. 아프다는 가장 평범한 핑계를 대고 싶었지만 연기력이 부족하고 겁이 많아서 시합 직전에 화장실로 자연스럽게 도망치는 계획을 선택했다. 그러나 일곱 명씩 열을 맞춰 대열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호루라기를 불던 체육부장 선생님의 통솔은 나를 꼼짝없이 출발선에 서게 만들었다.

예상대로 총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란히 출발했던 친구들이 모두 나를 앞서 나갔다. ‘너무 늦어서 웃음거리는 되자 말자’는 맘으로 속도를 내는데 느슨하게 풀린 운동화 끈이 발에 밟혀 그대로 고꾸라졌다. 때마침 뒤 조가 출발해준 덕분에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고, 그 틈에 나는 다친 다리를 끌고 결승선까지 완주했다. 그때 갑자기 선도반 친구가 내 손등에 ‘2등’ 도장을 찍었다. 뒤 조의 1등이 나를 제치는 바람에 내가 별안간 2등이 되고 만 것이다.

무릎을 가슴까지 높게 당겨 뛰면 앞으로 나가기 위해 발로 땅을 구를 때와 또 다른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스텝에 균형을 만들고 내 몸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껴보는 동작이다. 그걸 가르쳐준 건 육상부 활동을 하던 단짝 친구였다. 대회에서 좋은 기록을 갖고 있던 친구는 쑥쑥 느는 자신의 재능에 확신이 있었다. 학년이 바뀌며 훈련의 강도가 올라갈 때도 친구는 싫은 내색 한번 보이지 않고 훈련에 매진했다. 종종 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체벌과 기합을 받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뜩이나 달리기를 질색하던 나는 점점 말이 없어지는 친구의 곁에서 울적함을 느끼며 달리기를 더욱더 증오하게 되었다.

5월 말 공개된 ‘나이키’의 캠페인 ‘새로운 미래’는 ‘엎드려 뻗친’ 자세로 기합을 받고, 강제로 삭발을 당하고, 선배와 지도자에게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숨도 편히 내뱉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얼굴 위로 내레이션의 톤이 바뀐다. “만약에, 모든 게 바뀐다면? 우리 마음대로, 우리 방식대로.” 도복을 입은 아이들이 도장 안을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야구복을 입은 아이들이 짜릿한 표정으로 홈에 슬라이딩을 하고 헹가래를 친다. 시원하게 쏘아 올린 화살이 공중에 떠 있는 메달의 금을 산산조각 내자 운동장 한가운데서 폭언을 들으며 기합 받던 아이 하나가 몸을 일으킨다. 동시에 잔뜩 위축되어 있던 아이들이 분노를 터뜨리듯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간다. “솔직히 좀 즐긴다고 큰일나는 것도 아니잖아?” 내레이션과 함께 아이들의 표정이 분노에서 환희로 바뀌었을 때, 이 새로운 미래를 보증하듯 심석희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등장한다.

선동열 전 감독은 “스포츠에서 2등은 꼴찌와 같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선수시절 내내 최고의 자리를 지킨 자의 당연한 소신은, 응원하는 팀의 우승을 바라는 많은 스포츠 팬들의 공감을 샀다. 그러나 ‘성과주의’는 결과만큼 치명적인 부작용도 함께 자란다. ‘내부적 문제’ ‘관행’이란 말을 포함하는 집단의 폐쇄성은 결국 힘의 위계를 만들고, 위력을 행사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준다. 존중과 보호 대신 억압과 복종에 길들여진 피해자들은 ‘개인의 성과’나 ‘집단의 존속’을 위해 침묵할 것을 강요당하며 자신을 잃어간다.

미래는 바꾸려는 자들의 용기만으로 오는 것이 아님을 슬프게 통감하는 요즘은 피해자에게 불필요한 용기를 갖게 만들고 결국 그 용기마저 무력화하는 역겨운 폐쇄성의 파멸을 기원하게 된다. 다시 태극마크를 달게 된 심석희의 미래가 곧 세상의 미래가 되기 위해선 갇히고 고여 오염된 것들을 철저하게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할 테니까.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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