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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경향시선

물이 마르는 동안

경향 신문 2019. 11. 11. 10:03

햇볕을 한 장

한지를 한 장


겹겹으로 널어둔 그 집 마당은

고서(古書)의 책갈피처럼 고요했네


바람만이 집중해서

뜻 모를 글귀를 적어가고 있었네


종이가 마르는 동안

할머니의 눈꺼풀이 얇아지는 동안


마당 한쪽의 감나무는

그림자를 살짝 비켜주었네


길상호(1973~)


이 시의 풍경은 매우 고요하다. 마당에 환하게 밝은 햇볕이 내리고 있다. 그리고 종이를 떠서 널어 말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 햇살은 내리고, 그 햇살에 종이를 널어 말리고 있는 이 집의 마당은 마치 오래된 책의 낱장과 낱장 사이처럼 조용하고 잠잠하다. 속껍질처럼 희고 깨끗하다. 한 자락의 바람만이 은은하게 불어와서 백지 위에 어떤 구절을 써놓고 가는 것만 같다. 감나무의 그림자마저도 비켜서는 이토록 명명(明明)한 공간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다.

청천백일(靑天白日)이라고 했으니 하늘이 맑게 갠 대낮을 요즘은 더러 볼 수 있다. 가을이 짧은 게 아쉽지만, 가쁜 숨을 좀 내려놓고 말없이 가만하게 앉아 소란하지 않은 것을 바라보기도 할 일이다. 호수를 바라보면 우리의 마음도 수면이 참으로 잔잔한 호수가 잠시 동안이라도 될 수 있기에.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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