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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24일 임신중단(낙태)이 프라이버시 권리의 일종이기에 헌법적 권리에 속한다고 보았던 1973년 로 판례를 뒤집었다. 이를 두고 미국이 퇴보하고 있다느니, 연방대법원이 어쩌다 반동의 온상이 됐느니, 인권을 외면하는 당파적 엘리트 대법관들을 어찌해야 하느니 하는 식자들의 한탄과 염려가 들린다.

그러나 이 사태는 미국 시민들이 자초한 일이며, 그것도 미국의 진보와 보수 엘리트가 경쟁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 벌어진 일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두세 번 연속해서 인민의 대표를 뽑는 일을 그르치다 보면 이 꼴이 된다. 선출된 정무관이 정치적 고려에 따라 최고위 법관을 지명하고, 선출된 입법자들이 인민의 의지를 확인하지 않고 그를 인준하면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동적 결과를 놓고 한탄하고 염려할 일이 아니라, 그렇게 일이 돌아가도록 만든 선출된 자들을 감시하고 다그칠 일이다.

다른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도 투쟁의 결과로 성립했고, 또 투쟁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 세계의 각급 법정은 물론 청문회에서, 토론회에서, 대학 강의실과 학술지에서 임신중단이 과연 보편적 인권인지, 헌법적 권리인지, 그렇다 하더라도 정부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를 놓고 팔방으로 갈려 싸우고 있다. 임신중단 권리를 둘러싼 논쟁은 사안의 복잡성 덕분에 종교, 사회, 이념 단체들의 신조와 교의를 시험하는 시금석처럼 작동하고 있다. 신조와 교의 앞에서 모든 이론은 소진되고, 모든 논거는 부실해 보인다. 그러면 남는 것은 최고위 법관 지명권을 놓고 벌어지는 헌법정치의 투쟁밖에 없을 텐데, 실로 지난 20년간 미국의 대통령선거란 대법관 지명권을 노린 지분투쟁처럼 보였다.

로 판례가 결국 뒤집히리란 것은 누구나 예상했던 일이다. 미국의 진보적 법관들마저 임신중단을 프라이버시 권리로 포장했던 로 판례의 법리가 그대로 유지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레이건 행정부 이래 미국 보수주의자는 정의란 더 나은 법리와 논거가 아니라 더 많은 수의 대법관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헌법재판을 통해 판례를 뒤집으려는 전략을 치밀하게 세웠고, 그중에는 예일 법무대학을 졸업한 지 6년 만에 레이건 행정부의 송무실에 가담한 ‘젊은 보수주의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이번 로 판례를 뒤집은 판결에서 다수의견을 작성한 얼리토 대법관이다.

역사 이성의 간지라 해야 할까. 트럼프 대통령의 지명권 행사로 보수 대법관이 절반을 넘은 미국 연방대법원이 들고나온 비장의 법리는 다름 아닌 민주적 대표성이다. 얼리토 대법관은 판결문에서 1963년 캔자스 정부정책을 옹호했던 판결을 두 번이나 인용하면서 “법원은 자신의 사회적·경제적 신념으로 입법부의 판단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꾸짖었다. 사법부는 임신중단과 같이 도덕적으로 심각한 사안에 대해 인민과 입법부의 권능을 참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향후 미국 연방의회가 임신중단 권리를 로나 케이시 수준으로 복원하는 법을 만들더라도 그가 같은 주장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

미국 시민들이 새로운 “헌법정치의 순간”에 처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우리가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의 문제는 제6공화국 헌정 질서의 못마땅한 부분을 입법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선해나가지 못하는 사정에 있다. 예컨대 헌법재판소는 2019년 형법상의 ‘낙태죄’ 조항들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한다며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어쩐지 헌법불합치 조항들을 대체하는 법을 만들지 않고 다른 일로 바쁘다. 미국의 주의회와 연방의회는 이제 각자 다른 이유로 임지중단 권리의 한계를 놓고 입법전략을 고민하기 시작했기에, 두 나라 시민들은 기묘하게도 서로 다른 이유로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됐다. 여성의 인권을 심각하게 여긴다면 이제라도 당신은 입법자를 독려하는 싸움에 나서야 한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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