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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반성하지 않는 자들

경향 신문 2019. 7. 23. 11:01

테사 모리스 스즈키는 <우리 안의 과거>라는 책을 통해 “과거는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기억되고 역사화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한·일관계의 위기를 둘러싸고 이적행위에 가까운, 정부 전복이라도 희망하는 듯 막말을 쏟아내는 일부 수구언론과 정치권의 행동을 살피기 위해 10년 전의 우리, 어쩌면 20여년 전의 우리로 되돌아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화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에 이르는 정권교체 과정은 보수기득권 세력과 일정한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다. 비록 국민이 열망하는 전면적 민주화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개혁이 조금씩이나마 진행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대한민국의 수구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입지와 이해를 크게 위협하는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에 의해 기획된 문화투쟁은 자신들이 장악한 언론사를 통한 거대한 반동이었다. 1987년 민주화투쟁을 통해 우리 사회의 정치공간이 대폭 확장되었지만, 확장된 공간으로 스며든 것은 민주화, 노동운동 세력이기보다 그간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야합하던 수구세력이었다. 

3당 야합을 통해 한 뿌리가 된 김영삼 정부였지만, 그들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자학적 역사관으로 비판하면서 반공친미주의를 앞세워 권력을 장악하고, 분단을 고착화한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국부(國父)’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부활시키는 상징조작에 나선다. 이승만을 앞세워 자연스럽게 박정희로 연결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김영삼 정부가 추진했던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의미는 사라지고, 한보와 김현철 사건 등으로 실추된 정권의 도덕성을 만회하기 위한 인기 전략으로 치부되었다. 무능한 민주화 세력에 대비되는 유능한 박정희의 근대화 세력이라는 이미지가 강력한 리더십과 청렴, 자기희생과 경제성장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박정희 사망 10년 즈음에 실시된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과오보다 공적이 많았다”는 응답이 전체 61%를 차지했다. 과거는 선택적으로 기억된다는 점에서 ‘질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탄압, 인권과 민주주의의 상실은 쉽게 망각된 반면 ‘양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각종 경제지표와 생활지표들이 부각되었다. IMF 외환위기로부터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유산과 철저하게 결별하기는커녕 도리어 박정희기념관 건립 지원을 약속했다. 표면적으로 화해와 용서를 말했지만 사과 없는 일방적 용서였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100일의 밀월조차 허용되지 않을 만큼 수구언론의 난타를 당했다. 이것은 훗날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쉴 틈 없이 진행되었다. 무능한 민주에 대한 실망이든, 문화투쟁의 결과였든 10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이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렀다. 수구세력이 펼친 문화투쟁의 정점은 2008년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정권의 방송통신위원회 출범이었다. 대통령의 멘토라 불렸던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과 이명박 정권은 과거 두 번의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원인을 ‘공중파 방송’ 때문이라 보았고, 집권 직후부터 공영방송을 비롯한 미디어 장악을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언론 장악을 위해 이명박 정권이 경찰, 검찰, 국세청, 법원,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같은 국가기관까지 총동원하여 공영방송 사장들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축출되었다. 이후 MB특보 출신 사장들은 눈에 거슬리는 언론종사자들을 걸러냈고, KBS와 MBC를 비롯한 공영미디어 시스템은 무력화되고 말았다. MB정권과 방송통신위원회는 종편 채널들을 각종 특혜와 편법을 통해 신설하도록 제도화했다. 지금도 우리는 과거 정권의 언론장악 기도가 남긴 상처와 공포를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으며 오늘을 기만하고 왜곡하는 자들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도 존재한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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