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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핵가족 모델은 한국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만들어낸 현대적 가족의 표상이었다. 70년대 이후, 이 모델은 ‘국민’으로 호명된 사회 구성원들이 교육-취업-결혼의 경로를 거친 후 성취해야 하는 대표적 생애과업 중 하나였다. 이 모델이 오작동의 징후를 내비치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가장 먼저 변화의 조짐을 보인 것은 90년대에 강남이나 수도권 신도시에서 ‘내집 마련’의 생애과업을 마친 60년대생 엘리트들 일부였다. 그들은 전문직·사무직의 임금 상승,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소득 증대를 에너지원으로 삼아 자녀 교육의 ‘세계화’를 시도했다. 어린 자녀는 엄마와 함께 해외 유학길에 나서고 아빠는 고국에 남아 직장 생활을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보내는 변종의 핵가족 모델, 이른바 ‘기러기 가족’이 출현했던 것이다.

이들의 ‘조기유학’ 전략은 중산층 내부의 치열한 사교육 경쟁을 우회하기 위한 방편이자, 자녀 세대의 ‘탈조선’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적어도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전까지 이런 경향이 계속 확대되어 2006·07년 시기에 초등학생 조기 유학생 수는 각각 9773명, 1만921명, 고교 해외 유학생 수는 각각 6319명, 7230명을 기록했다.

한편 이 시기에 ‘출산’이라는 생애과업을 앞두고 있던 70년대 초중반생 부부 일부는 이전 세대와는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들이 30대 나이로 맞이한 21세기는 중산층 신규 진입경로에서 극심한 정체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취업의 관문은 높아졌고 임금 격차는 벌어졌으며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는 폐지된 상태였고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다. 따라서 결혼은 했으나 ‘내집 마련’의 기회를 잡기 어려워진 이들이 부모 역할을 뒤로 미루거나 자녀를 하나만 갖기로 작정한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문제는 이런 선택이 누적되다 보니 저출산이 대세가 되었다는 점이다. 2002년에 49만명대로 주저앉은 출생인구는 줄곧 40만명대를 유지했다.


여성단체 회원들이 3일 광화문에서 ‘세계 여성의 날’(3월8일) 103주년을 앞두고 노동·복지 등 각 분야의 성차별과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_경향DB


물론 그들 중 일부는 보유 자원을 총동원하면서 중산층-핵가족 모델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앞선 세대의 자산 증대에 크게 기여한 부동산 가격 폭등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이란 간단했다. 맞벌이 부부로서 근로소득 증대에 초점을 맞추면서 저금리의 대출을 통해 서울이나 수도권 아파트에 거처를 마련한 다음, 친정 부모를 아기 돌보미로 동원해 육아 비용을 내부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전략은 특정 계층에 편중된 것으로, 쉽게 확대 재생산될 수 있는 부류의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중산층-핵가족 모델이 이렇듯 오작동의 징후들을 남발하던 시점에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을 앞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2000년 남성의 진학률은 여성보다 5% 정도 앞섰지만, 2009년을 기점으로 역전되었다. 2014년 남녀의 대학진학률은 67.6%, 74.6%였다. 흥미롭게도 이 역전의 주역들은 출생아의 남녀 성비가 압도적으로 불균형 상태였던 시기에 태어난 여성들이었다. 이 시기의 출생성비는 1990년 116.5, 1993년 115.3, 1994년 115.2였다.

만일 저성장 시대의 진입을 배경으로 중산층-핵가족 모델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려 한다면, 그 변화의 주도 세력으로 이 젊은 세대의 여성들을 지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들 중 상당수가 만성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 가부장제 기반의 핵가족 모델이 ‘어머니’의 희생으로 겨우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고, 대학 교육을 통해 견문을 넓히면서 가정주부와는 다른 자유로운 삶의 가능성을 목격한 바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들이 독립 여성이자 개인으로서 생애과업을 새로 정의하며 부모 세대와는 다른 가족 모델을 모색하려고 할 때마다 거대한 장애물과 매번 맞닥뜨리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남녀 임금 격차 OECD 1위, 성평등 지수 117위를 기록하며 중산층-핵가족 모델의 숙주 구실을 해온 한국 사회 자체가 바로 그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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