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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제도화된 갈등이다. 그리고 갈등에는 전략이 필요하다. 전략 없는 갈등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우왕좌왕하다가 뒤통수 맞기 십상이다. 다가오는 총선에서 갈등 전략이 필요한 영역 중 하나가 비례정당이다. 자유한국당은 공언했던 대로 비례정당 창당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작년 12월에 이루어진 조사들에 따르면 기존의 정당 지지율을 적용해서 한국당 지지자들이 지역구에서는 한국당 후보를 찍고 정당투표에서는 비례정당을 찍는다고 가정할 경우 한국당의 실질적 의석은 지금보다 10석 이상 늘어나고 1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게임이론의 세계적 석학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토머스 셸링이 쓴 <갈등의 전략>이라는 책을 보자. 어떤 경우에는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누구나 암묵적으로 합의하는 균형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보자. 전쟁과 이산의 경험이 아직 생생하던 1970년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은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혹시라도 또 한 번의 전쟁이 일어나서 가족이 흩어지게 되면 나중에 어디서 만날까? 정답은 서울역 시계탑 앞이다. 그 당시에는 서울역 시계탑이야말로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서울에서 가장 ‘현저한’ 랜드마크였으니까. 서울이 아니라 뉴욕이라면 그랜드 센트럴 역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1부터 4까지 번호가 붙어있는 똑같이 생긴 네 개의 상자가 있다. 두 사람이 게임에 참여하는데, 상대방과 의논할 수 없는 상태에서 둘이 같은 번호를 고르면 각각 10만원의 상금을 받고 다른 번호를 고르면 빈 손으로 돌아간다. 몇 번을 고를까?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만약 다른 상자는 흰색이고 1번 상자만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상자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1번 상자는 일종의 시그널이 되고, 두 사람은 동시에 1번을 고를 가능성이 많다. 소위 ‘셸링 포인트(Schelling point)’라고 하는 균형점이다. 그런데 셸링 포인트는 문화적 맥락에 의존한다. 만약 남들과 다른 것은 불행을 가져온다는 믿음이 널리 퍼진 사회라면 둘은 1번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1번은 아니다”라는 공통의 인식을 가질 수도 있다.

한국당에 비해 민주당은 비례정당을 창당하기가 훨씬 어려운 입장이다. 만약 한국당만 비례정당을 창당한다면 마치 빨간색의 1번 상자처럼 하나의 시그널, 즉 셸링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표를 모아주는 시그널이 될까 아니면 최소한 한국당은 아니라는 시그널이 될까. 유일한 빨간 상자를 좋게 볼 것이냐, 나쁘게 볼 것이냐의 문제이다. 

앞에서 한국당에 유리한 시나리오를 검토했으니 이번엔 반대의 시나리오를 보자. 우선 선거법의 빈틈을 이용해서 위성정당을 통해 표를 모으겠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고 규칙위반이다. 일부 악덕 재벌의 위장 계열사나 조세회피처에 세운 페이퍼 컴퍼니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선거법 개정을 막기 위해 한국당이 동원했던 알바니아나 베네수엘라 등의 사례는 선거법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당의 문제를 보여준다. 이들 국가에서 위성정당으로 인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무력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비슷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위성정당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독일이나 뉴질랜드는 어떻게 된 일일까. 알바니아나 베네수엘라는 정치 후진국이어서 제도의 빈틈을 악용하는 정치세력이 용납되고, 독일이나 뉴질랜드는 정치 선진국이어서 그런 세력은 응징을 당하기 때문이다. 빨간 상자는 알바니아나 베네수엘라에서는 표를 모으는 시그널이고 독일이나 뉴질랜드에서는 정치적 자살의 시그널이다. 알바니아나 베네수엘라 사례는 선거법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빈틈을 악용하려고 드는 한국당이 알바니아나 베네수엘라 수준의 정당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정의당에 표를 모아주는 것이다. 실제로 새해 들어 이루어진 여론조사들을 보면 앞에 소개한 작년의 조사들과는 달리 한국당의 의석은 오히려 줄고 정의당이 약진한다는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선거법 개정에 동참한 세력들이 공동으로 지분 출자를 하는 공동 비례정당을 창당하는 것이다. 범민주 혹은 다당제의 가치하에 연대할 수 있어서 한국당의 비례정당이 가지는 정치도의적 문제로부터 자유롭고, 그 자체가 하나의 소규모 연정 실험이 될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한국당의 ‘빨간 칠’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 시그널이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든 야든 갈등의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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