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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관련이미지/ 김상민 기자

1960년대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 수학자들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에 화장실에 얽힌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은 단 한 곳뿐인 ‘유색인종 여성용’ 화장실에 가기 위해 날마다 서류뭉치를 들고 하이힐을 신은 채 800m의 거리를 질주한다. 어느 날 비를 흠뻑 맞으며 화장실에 다녀온 주인공에게 상사가 그 고충도 모른 채 왜 자꾸 자리를 비우느냐고 따지자 주인공은 폭발하고 만다. 인종과 여성이라는 겹차별의 고통을 드러낸 장면이다. 누구가 한번쯤 경험해봤을 것이다. ‘위기 일발’의 상황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하거나, 너무 멀거나, 혹은 화장실에 비어 있는 칸이 없을 때의 심정을.

그런데 이런 고통이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 벌어진다면 어떨까. 4일 민주노총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개최한 ‘여성노동자의 화장실 이용 실태와 건강’ 토론회에서 그 실태가 소개됐다. 설문조사 결과 여성노동자 10명 중 4명이 근무 도중 화장실 사용이 어려워 수분과 음식 섭취를 자제한다고 응답했다. 일하는 장소에서 1~2분 거리에 화장실이 없다는 응답이 13.1%, 화장실에 도착해도 1~2분 내에 사용할 수 없다는 답도 13.4%였다. 그 결과 상당수가 질염 및 생식기 주변 염증, 방광염 진단을 받았으며, 절반 이상이 화장실 때문에 불안·우울 등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모두가 남성을 기준 삼은 일터의 현실이다.

지난 20년간 우리 공중화장실 여건은 혁명적으로 개선됐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시작된 ‘깨끗한 화장실 만들기 사업’ 등으로 우리 화장실은 남부럽지 않은 청결도를 유지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 개선 방안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고 있다. 이젠 일터의 화장실을 바꿀 차례다. 헌법 32조 3항은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화장실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위생권과 건강권, 인권의 문제가 걸린 장소이다. 8일 여성의날을 앞두고 여성노동자들이 외치고 있다. “화장실을 원할 때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우리는 빵과 장미, 그리고 화장실이 필요하다”고.

송현숙 논설위원 song@kyunghyang.com


 

오피니언 여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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