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사료의 엄밀성과 정론직필 때문이었다. 일본의 삼대실록과 베트남의 대남실록은 물론 실록의 원조국가인 중국의 대청역조실록·황명실록 등 모든 실록 가운데 유독 조선왕조실록만이 기록유산으로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받은 까닭이 그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정론직필이 가능했던 것은 핵심 사료인 사초와 완성본인 실록에 대해 열람을 매우 엄하게 제한하고 이를 철저히 지킨 덕분이다.


엄밀하게 관리돼야 할 기록이 정쟁의 도구가 되면 피바람을 부른다. 수많은 선비를 죽인 조선시대 사화의 시작도 김일손의 사초가 발단이 된 것이다. 조선 왕 가운데 유일하게 사초를 들춰 무오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은 그 자신도 정쟁에 희생돼 비극적 말로를 걸었음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최근 대통령 기록을 놓고 벌어지는 정치·사회적 논란을 바라보면서 개탄과 우려를 하기에 앞서 선조들이 이룩한 자랑스러운 기록문화의 전통과 이를 정쟁에 이용한 결과가 가져온 참담한 교훈을 되새겨본다.



새누리당이 지난 22일 ‘대통령기록관 시위’도 모자라 그제는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민주당 정부의 영토주권 포기 등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민주당 정부의 영토주권 포기 및 역사 폐기 등 진상조사특별위원회’로 확대 개편하는 등 ‘노무현 전 대통령 기록’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이정현 선대위 공보단장은 “사초를 폐기하려고 한 (노 전 대통령의) 시도가 정말 있었다면 이것은 5000년 내 최초의 ‘역사 폐기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했고, 박근혜 후보도 “소식을 듣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새누리당은 대통령 기록물 열람 요건을 완화하는 법 개정도 추진하기로 했다.


우선 공당의 책임 있는 인사가 일부 언론 보도를 빌미로 ‘사초 폐기’니 ‘역사 폐기’니 하며 진실을 호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노 전 대통령이 주재한 2007년 5월22일 수석보좌관회의가 대통령지정기록물 목록 공개 여부에 대한 논의였고, 그 취지가 ‘사초 폐기’가 아니라 ‘사초 보호’를 위한 것임은 본인이 잘 알 것이다. 발언록이 지정기록물이라면 그 내용을 누설하는 행위가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7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해당하는 죄임도 모르는 바가 아닐 것이다. ‘기록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현행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의 바탕이 된 예문춘추관법 대표 발의자였다. 예문춘추관법안에도 지정기록물 열람 요건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었고, 비공개 기간은 최장 50년으로 현행법보다 더 엄격했던 것 또한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 것이다.


기록에 관한 한 도의적으로도 새누리당과 이명박 정권은 말할 자격이 없다. 이 대통령 취임 초부터 노 전 대통령의 기록 유출 논란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기록관리제도의 근간을 뒤흔든 정권이자 정당이다. 따지고 보면 사초 폐기는 전 정부의 특별한 예가 아니라 현 정부의 일상사였지 않은가. 민간인 사찰 기록, 용산참사 기록, 상지대 옛 재단 복귀를 결정한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속기록, 감사원의 농촌공사 쌀직불금 감사 자료 등 민감한 기록을 비공개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파기 또는 삭제한 것이 언제였는가. 새누리당 박 후보 캠프는 “가능하면 보안을 위해 문서도 만들지 않고 보고 즉시 파기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생각”이라는 고위관계자의 말이 보도될 정도로 폐쇄적이다. 


자신은 기록을 남기지 않고 남의 기록을 갖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동서고금의 추악한 정쟁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그렇게 사초가 중요하다는 걸 인정한다면 더 이상 기록을 눈앞의 대통령 선거를 위한 정쟁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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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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