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경북 청도 운문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다. 비구니 절로 유명한 운문사이지만 여러 칸의 객방이 따로 있어서 가끔은 남자 손님도 재워준다. 절 사진을 찍느라 거기 오래 묵고 있는 작가를 만나러 갔던 건데, 그는 앉은뱅이책상과 조그만 반닫이 하나가 있는 방에서 조촐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기물도 없이 텅 빈 그 방은 얼마나 고졸하던지! 그 겨울밤 우리는 둘이 누우면 꽉 차는 방에서 창호 두 짝을 통해 쏟아지는 별을 보며 자연과 인간과 세상살이를 밤새 이야기했다. 그 뒤로 절에 갈 때마다 나는 대웅전, 극락전 같은 웅장한 공간보다 ‘요사채’라 부르는 승방을 기웃거리곤 한다. 대개는 나 같은 잡인들이 얼씬 못하게 닫혀 있지만 텅 빈 수도의 공간을 훔쳐보는 건 남모를 즐거움이다.

베를린 유대인박물관에 가면 ‘홀로코스트 타워’라는 공간이 있다. 차디찬 콘크리트 벽과 캄캄한 어둠에 갇혀 있는 그 방은 방형(方形)이 아닌 날카로운 예각으로 모서리를 만들어 공간에 들어선 사람을 몸서리치게 한다. 나는 일부러 그 공간에 오래 머물러 보았다. 뾰족하게 이어진 천장에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이 전부인 공간은 참혹했고, 마치 실존의 극한에 선 듯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인간의 날 것 같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화려한 대웅전보다 담백고졸한 승방을 더 좋아한다고 했지만, 같은 이유로 나는 절보다 서원이 좋다. 무소유를 말하는 사찰이 우습게도 금칠한 불상과 화려한 기물들로 사람들의 복락을 비는 데 몰두하는 반면, 서원은 유교의 오랜 청빈 사상을 구현하듯 결벽하고 단정한 공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서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안동에 꼭 가볼 일이다. 지난여름 나는 안동에 갔다가 전에는 놓쳤던 경험을 몇 가지 얻고 돌아왔다. 유명한 도산서원, 병산서원, 하회마을보다 퇴계 선생의 자취들만을 따라가 본 덕분이다. 퇴계 선생은 50세 되던 해에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안동의 한미한 냇가로 물러나 계상서당을 연다. 두 칸의 코딱지만 한 공간인데, 1000원짜리 지폐에서도 이 서당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유성룡, 김성일 등 20여 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다니 선생의 앎은 공간의 크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다. 젊은 율곡은 오래도록 흠모하던 퇴계를 만나러 계상서당에 찾아와 시를 바친다.

“시냇물은 수사(洙泗)에서 갈라져 나왔고/ 봉우리는 무이(武夷)처럼 드높도다/ 제가 바라는 것은 도를 묻는 일이오니/ 반나절 헛되이 보낸다 생각지 마소서.” ‘수’와 ‘사’는 주자가 살던 복건성의 물 이름이고 ‘무이’는 산 이름이니, 퇴계의 거소가 공자와 주자의 학문을 잇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칭송이었다.

그러나 퇴계도 계상서당이 비좁은 것을 안타까워한 제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말년에는 도산으로 서당을 옮긴다. 우리는 도산서원의 위용에 찬탄을 보내지만 사실 서원의 정수는 초입에 자리한 도산서당에 있다. 겨우 세 칸짜리 초옥인데도 선생은 서당을 새로 지은 후 걸핏하면 건물이 너무 넓다 불평을 했단다. 여기서 100여 명의 제자가 늘 배웠다니 공간의 쓰임이 놀랍다. 퇴계가 허용했던 것은 이 공간뿐이고 서원의 나머지 웅장한 건물은 후대에 지은 것들이다. 그렇게 안동은 점점 예법과 격식만을 좇는 공리공담의 중심지가 되어 간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환경과 단 몇 평의 공간에서도 우리는 생각의 깊이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아쉬울 게 없이 갖춰진 궁궐, 관저, 저택은 사람을 가두고 생각까지 가두는 법이다. 퇴계의 서당은 바깥의 자연과 세상에 바로 이어져 있었다. 수용소의 유대인은 아마도 차디찬 콘크리트에 갇혀 있었을지언정 그의 영혼만큼은 새처럼 자유롭게 바깥을 날았을 것이다.

파리의 화려한 ‘파사주’를 물신적 소비가 들끓는 공간으로 명민하게 관찰했던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경험 속의 가난이 빈자에게 무슨 작용을 하는가? 그것은 그로 하여금 처음부터 시작하도록,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조그만 시도를 공들여 하도록, 조금을 가지고 시작해 더 크게 키우도록 만든다.”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성이라는 얘기다. 성서 역시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거니와 그것은 가난한 마음이야말로 우리 존재에 부족한 무엇인가를 찾고 갈구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2017년 새해에는 서로의 행운과 복을 빌어주되 그것이 더 많은 소유와 소비에 대한 갈망이 아니기를 빈다. 모두들 생각과 마음의 성장을 이루는 한 해가 되시기를.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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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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